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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의 한복판에서 - 디지털 약자에게 적정기술의 사목이란[특별기고 - 주원준]

2월에는 부활미사를 드릴 줄 알았다. 이제는 언제나 영성체를 함께 모실지 알 수도 없다. 유튜브를 통해 미사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성당에서 오는 문자와 서신은 퍽 늘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고통은 늘어나는데 위로가 손에 닿고 있을까? 편집장의 요청을 받아 아래와 같은 생각을 두서없이 짧게 나눠 본다.

1. 성경적 반성: 우리는 새로운 광야에 들어섰다

잠시 성경을 보자. 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부들은, 교회란 마치 광야를 걷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아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역사를 순례하는 공동체라고 성찰했다.(LG 9) 성경의 첫 다섯 권, 곧 모세오경의 무대는 대부분 광야다. 이집트를 탈출한 다음, 그러니까 대략 탈출기 중간 즈음부터 레위기와 민수기를 거쳐 신명기까지 무대가 줄곧 광야라는 점은 굳이 성경을 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창세기 일부 조상이 광야를 지났거나 광야 근처를 방랑했던 걸 상기해 본다면, 모세오경은 대부분 ‘광야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모세오경의 광야를 흔히 ‘공간’으로 이해들 한다. 하지만 공의회의 교부들의 성찰에 따라 ‘시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성경적일 것이다. 성경의 광야는 단순한 ‘지리적 정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였고 미지의 ‘차원’이었고 총체적 ‘도전’이었다. 광야에서는 어느 민족이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지조차 막막했다. 백성들은 고통이 컸고 때로 분열하고 일부는 거역했다. 정해진 경로라곤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전인미답의 공간으로 백성과 함께 성큼 들어선 모세는 차라리 내던져진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평생 백성의 마음을 하느님 주위로 굳게 뭉쳐 두려고 애썼다. 그는 결국 광야에서 죽었다. 죽은 장소는 모르지만 하느님이 묻어주셨다는 말씀만 영광스럽게 남았다.(신명 34장) 코로나 바이러스로 많은 사람이 고통당하고 일부는 안타깝게도 생명을 잃었다. 모세를 묻어주신 하느님께서 돌아가신 분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시길 기도한다.

3월 27일 텅 빈 베드로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선사한 강론은 역사에 남을 만한 것이었다. 성체강복 강론에서 교종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길 빌며 마르코 복음 4장 말씀, 예수님께서 풍랑을 가라앉히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성 이냐시오의 성찰을 연상시키는 강론을 듣다가, 필자는 ‘풍랑을 만난 작은 배’는 ‘광야에서 헤매는 작은 백성’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약과 구약은 늘 이렇게 근본적으로 통한다.

하느님 백성은 늘 그랬다. 지난 수 세기만 돌아봐도, 르네상스, 종교개혁, 자본주의, 식민주의, 사회주의, 세속화, 이민, 환경, 페미니즘 등등 이루 나열하기 힘들 정도의 새롭고 다양한 도전에 맞닥뜨려야 했고 지금도 그렇다. 한국 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분단과 동북아의 평화 등 독특한 도전도 안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코로나가 닥쳤다. 우리는 사회적 거리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 주위에 백성을 뭉쳐 두는 방법은 무엇일까.

2. 의연하고 훌륭한 종교를 향하여

그저 평범한 평신도의 느낌부터 솔직히 말하겠다. 이른바 ‘코로나 사태’가 완전히 종식될 때까지 ‘미사 재개 여부’가 교회가 발산하는 첫째 메시지가 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교회가 미사 재개에 조바심을 내는 듯한 인상, 조금 거칠게 표현해서 대규모 집회를 다시 여는 일에 안달이 난 집단처럼 보인다면 어떨까. 그런 종교집단은 ‘또 하나의 신천지’나 ‘신천지와 겨우 다른 어떤 집단’처럼 보일 뿐이다. 교회는 그런 집단과 동류로 비쳐서는 안 된다. 사이비와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 집단이라면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고 처신해야 한다.

‘종교집회 재개’라는 말에는 사회적으로 어떤 불안한 시선이 서려 있다. 의료인들은 물론이고 사회의 다른 부분은 모두 잘 인내하고 손해를 감수하는데 일부 종교가 ‘말썽꾸러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묻어 있다. 세금 꼬박 내고, 투표도 거르지 않고, 평소 자녀들 키우고 부모님 모시면서 세계에서 일도 가장 많이 하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한국인들에게 그런 종교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믿을 만한 교인’이란 더 인내하는 사람들이지, 기득권을 더 거세게 요구하거나 분별없이 서두르거나 스트레스를 높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시민정신’은 위기의 해결책이지만 ‘믿음’은 문제를 심화시키는 것이라고 인식되어서도 안 된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믿음’이 있음을 확인받고 싶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동안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단체들은 모임을 중단하며 유튜브 등의 디지털 수단으로 종교예식을 거행했다. ⓒ왕기리 기자

- 떨어져서도 가깝게, 멀리 있어도 함께 

미사는 상점의 영업 같은 것이 아니다.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의 수는 어떤 매출 기록 같은 것이 아니다. 백성이 하느님 주위에 충실히 잘 모이는 것은 무척 중요하지만, 때로는 다른 방법으로 ‘공동체성’을 유지하는 일을 생각할 수도 있어야 한다. ‘떨어져 있어도 가깝고 멀리 있어도 친밀한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광야의 백성처럼 간절하고 창의적일까.

돌아보면, 매일 저녁 9시에 한반도의 평화를 빌며 주모경을 바치자는 권유는 어떤 징표적 의미가 있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지향과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하느님 백성이 물리적·사회적으로 떨어져 있으면서 영적으로 함께 있는 일’을 마치 준비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한반도의 평화’라는 주제는 한국 교회의 고유한 과제이기도 하였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이렇게 ‘떨어져 있지만 함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부지런히 나왔다. 대개는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유튜브 미사나 강론도 풍부하고 문자나 단톡방도 활발하다. 일부는 화상회의식으로 모임을 했다. 그 결과 ‘교회 콘텐츠’가 디지털 세상에서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교구도 본당도 수도회도 앞다투어 내놓는다.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어지러운 느낌도 든다. 개별 콘텐츠의 클릭수는 별로 높아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런 콘텐츠가 과연 보편적으로 수용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3. 디지털 약자를 위한 적정 기술이란

잠시 ‘디지털 약자’ 또는 ‘정보의 약자’를 생각해 보자. 유튜브 미사를 보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조건이 적절히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인터넷 접속속도, 핸드폰 등의 최종단말기, 원활한 조작 능력, 가능한 시력과 청력, 이해력, 시간적·정서적 여유 등이 전제된다.(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에 준비되지 못한 분들이 많다.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부족할 수도 있지만 그런 콘텐츠를 음미할 여유가 없는 분들도 많다. 첨단기술은 훌륭한 도구이지만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다.

필자는 디지털 약자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활발한 편이다. 하지만 이 디지털 세상은 ‘가상의’(virtual) 공간이요 세상의 실제를 담지 못한다고 늘 생각하고 산다. 페이스북에서 활발한 사람들은 대개 교육수준, 지위, 사회적 관심, 표현력, 자신감 등에서 이 사회의 중간을 훨씬 넘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과 소통하고 지원하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유튜브에 동영상 올려놓으면 다 된 것이 아니다. 본당이나 교구 홈페이지에 올려놓았으니, 문자로 다 보냈으니, 페이스북에서 다 공유했으니, 할 일을 다 했고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 유튜브 동영상 클릭수나 홈페이지 다운로드 횟수를 유심히 보길 바란다. 유튜브 동영상은 틀어 놓고 다른 짓(?) 하는 경우도 많다. 동영상의 품질과 등장하는 분들의 전달력과 설득력 등은 논외로 하자.

무엇보다 고통이 늘어나고 있음을 주목하자. ‘코로나 우울증’(또는 ‘코로나 블루’)이라는 말이 떠돈다. 이미 일용직, 자영업자, 소상공인, 프리랜서 등의 고통은 크다. ‘밥돌’이라는 말도 들었다. 집에서 하루종일 아이를 돌보는 엄마 아빠도 지쳐간다. 동영상을 클릭하거나 문자를 본다고 위로가 될까. 디지털 약자들은 어떨까. 우리에겐 첨단기술 보다는 적정기술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차라리 전화로 육성을 전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미지 출처 = Pxhere)

- 평신도 부제의 노력과 나눔을 참고하자

필자는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실천에 옮기는 곳이 있었다. 독일은 사제가 부족한 지 오래되어서 종신부제가 운영하는 본당이 많다. 필자의 독일 가톨릭 신학부 동창 가운데 지어로프(T. Zierof) 씨는 평신도 부제가 되어 작은 시골 본당을 책임지고 있다. 그의 부인도 신학부를 나와 같은 본당을 책임진다.(이들은 ‘캠퍼스 커플’이었다) 그들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미사를 못 드리니까 (본당 일꾼과 나누어서) 거의 700가구에 이르는 전 신자에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관련 기사는 아래를 보라. 
https://www.tagblatt.ch/ostschweiz/kreuzlingen/arboner-katholiken-beten-online-ld.1211438

그 결과는 놀라웠다. 일부 부정적 반응도 있었지만, 대부분 성당에서 오는 전화를 반가워했다. 다들 집에 있었고 다들 답답하고 스트레스 받았고, 문자나 유튜브에 지쳐 있었다. 모두들 역병과 단절로 고통받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인간의 얼굴과 목소리가 전달하는 대화와 인격적 반응과 위로에 그리웠다. 필자는 이 기사를 읽고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인격적 소통을 통한’ 위로와 기도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피와 살로 부활하셔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고 만지신 예수님 부활의 생생한 신비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자들은 어떻게든 다 자기들끼리 연결되어 연락과 사연을 주고받고 있었고, 새로운 전화번호도 스스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누구는 발길을 끊은 신자인데 이런 전화 받으면 좋아할 것 같다고, 누구는 지금 이런 어려움이 있는데 이런 기도를 바치고 싶다고.... 등등의 말씀이다. 이 평신도 부제 부부는 매일 몇 시에 교구와 무슨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니 함께 기도하자고 권유하며 기도 지향도 모으고 익명의 기도처도 운영한다고 한다.

외국의 경우를 그대로 이식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통과 스트레스가 늘어나는 이때, 신부님의 전화를 받고 잠시라도 대화를 나누고 신부님께서 기도해 주신다고 하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는가. 우리 본당은 신부님이 몇 시에 미사 드리시니 그 시간에 함께 기도하자고, 신자들의 기도를 말씀해 주시면 신부님이 미사 중에 드려주시겠다고 한다면, 문자나 유튜브가 제공할 수 있는 위안의 정도를 훨씬 넘어설 것이다. 쉬는 신자나 냉담 신자의 경우에는 새로운 신앙의 불꽃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발상을 역전시켜 보자. 모두가 힘들 때는 사실 모두에게 위로를 전할 큰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정부는 지금 잘 대응한다고 세계적으로 칭찬이 자자하다. 이럴 때 교회가 할 일은 우선적으로 위로와 기도다. 그리고 서로 육성을 나누다 보면, 국가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방법도 떠오를 것이다. 더 가난하고 더 힘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방법과 결심은 대화 중에 선물처럼 주어질 것 같다. 신부님들은 이 코로나 사태에 본당의 한 가정에 (최소한) 한 번은 전화를 다 돌린다는 각오를 해야 하지 않을까.

성당에서 드리는 전화는 무엇보다 따뜻해야 한다. 총선 여론조사나 제2금융권 대출의뢰보다는 친절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목적 부담을 덜어 줄 평신도 일꾼을 평소 잘 양성해 놓은 곳이 있다면 (있으면 좋겠다) 이번에 덕을 볼 것이다. 유튜브는 첨단기술이지만 일방적이고 건조하다. 전화는 적정기술이고 땀과 눈물이 쌍방향으로 흐른다.

4. 가짜뉴스를 정리할 계기가 될까

교회가 디지털 세계에 성큼 들어선 이 새로운 광야는 어쩌면 교회나 사회 관련 가짜뉴스를 정리할 어떤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디지털 약자들은 가짜뉴스에도 취약하다. 가짜뉴스는 가짜의 여부를 확인할 능력이 부족하거나 그 방법을 충분히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퍼진다. 그런 분들에게 이건 가짜뉴스라고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없다. 스스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그런 뉴스에 빠진다. 그보다는 그분들이 더 쉽고 직관적으로 가짜임을 확인할 수 있는 정말 단순한 어떤 방법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런 단순한 방법을 어떻게 마련할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유튜브에 미사와 설교를 올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디지털 공간을 더 쉽고 더 복음적으로 만드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가짜뉴스를 함부로 퍼나르지 못하게, 가짜인지 진짜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방법은 무엇일까. 인터넷 공간은 넓은 시장바닥에 비유할 수 있다. 거리에서 스쳐 들은 말이 때로는 머리에 더 오래 남는 법이다. 외국인 혐오도, 성에 대한 그릇된 태도도, 복음을 왜곡하는 사이비들도 더 쉽게 퍼진다. 예수님과 성인들은 저잣거리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인터넷 공간은 이 시대의 시장바닥이다. 

- 침묵의 메아리를

봉우리 사이에 거리가 충분해야 메아리가 멀리 퍼진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생긴 우리 사이의 공간이 고통과 스트레스의 원천이 아니라 복음과 위로와 사랑의 메아리를 울릴 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변한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광야로 들어섰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언젠가 물러간다. 역병이 창궐했을 때 어떤 종교가 가장 믿을 만하게 대응했는지, 누가 가장 큰 인내를 보여 주었고 참된 위로를 전했는지 하느님과 백성은 똑똑히 알아줄 것이다. 또한 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하느님 백성은 새로운 도전을 맞을 것이다. 떨어져도 함께 있고 멀리 있어도 가까웠던 우리는, 주님이 허락하실 때 반갑고 뜨겁게 다시 모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다시 전진할 것이다. 겁먹은 제자들에게 피와 살로 부활하셔서 큰 희망을 보여 주신 주님을 묵상한다.

주원준 

평신도 신학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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