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환의 세상잡설] 노회찬 의원을 떠나 보내며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1번과 2번이 망친 나라 12번이 살리겠습니다.” 2004년 17대 총선 캠페인에서 채택된 민주노동당의 구호였다. 이때 비례대표 8번이었던 노회찬이 한 말은 그의 대표적 어록이 되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시커매진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다.” 이 말은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면서, 동시에 진보정당의 시대적 필연성을 드러내 주었다. 아울러 노회찬이라는 인물을 마음속에 새기게 되었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혜성처럼 등장한 그이지만, 노동운동가이자 진보정당운동을 오래전부터 이끌어 왔던 인물이다.

총선을 앞두고 광흥창역 부근에 민주노동당 마포갑 선거사무소가 임시로 마련되었다. 이런저런 일을 거들면서 당의 의회 진출을 예상하고 마음이 들떴다. 그런데 조금 의아했던 것은 왜 노회찬이라는 인물이 비례 순위에서 8번일까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당의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듯한데, 선거 구호를 외치고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노회찬까지 당선되어야 할 텐데 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선거 캠페인은 당의 마포갑 후보를 위해 진행되었지만, 동시에 비례 대표 당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뻘쭘했지만, 나중에는 씩씩하게 선거 전날 저녁까지 “1번과 2번이 망친 나라 12번이 살리겠습니다”를 외칠 수 있었다.

선거 당일 오전에는 투표를 하고, 오후에는 투표소가 설치된 교회에서 선거 감시 요원으로 일했다. 선거가 끝나고 선거사무소에 들렀는데 당시 김혜경 대표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사무소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와 개표방송을 지켜보았다. 새벽쯤에 김종필과 노회찬의 당락이 바뀌었다. 만약 노회찬이 떨어졌다면 정말 2퍼센트가 부족한 선거였을 것이다. 우리는 이때 노회찬이라는 소중한 보물을 얻었다. 그가 국회의원이 되고 며칠 뒤 공안검사 출신 국회의원 정형근과 벌인 텔레비전 토론은 진보정치의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보여 주었다.

7월 23일 숨진 노회찬 의원. (사진 출처 = 연합뉴스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골리앗에 맞섰던 다윗이요 우리 시대의 착한 사마리아인

하지만 우리는 지금 노회찬이라는 소중한 보물을 잃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다음 날 아침까지 그는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선택이었을까? 그가 드루킹의 분탕질에 연루되어 세상을 뜨게 될 줄이야. 노회찬 의원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일궈 온 진보정치와 진보정당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떠안고자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노회찬은 마음 따뜻하고 품격 있는 정치인으로 특히 말의 재미와 격을 높였다. 그의 촌철살인적인 말들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다. 기득권 세력에게는 추상 같은 싸한 기운을 풍겨 냈지만, 대다수 선한 이들에게는 온기를 자아내는 말들이었다. 그의 삶은 그가 남긴 수많은 주옥 같은 말 그 이상이었다.

그는 삼성이라는 골리앗에 정면으로 맞선 몇 안 되는 정치인이다. 거대권력 삼성의 엑스파일 폭로로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고난의 길을 걸었다. 또한 해고노동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가 외면한 이들과 함께한 우리 시대의 착한 사마리아인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입법활동은 물론 그들이 싸우는 현장에서 같이하며 위로하고 힘을 실어 주었다. 그의 삶과 생각은 그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가치와도 상통했다. 노회찬 의원의 2012년 진보정의당 당대표 수락 연설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가 다시 회자된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노회찬 의원이 마지막으로 준비한 메시지도 삼성 백혈병 문제와 KTX 승무원 복직과 관련한 내용이다. “두 사안 모두 앞으로 최종 합의 및 입사 등의 절차가 남아 있지만 잘 마무리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봐도 산재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안을 10여 년이나 끌게 만들고, 상시적으로 필요한 안전업무를 외주화하겠다는 공기업의 태도가 12년 동안이나 용인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번 합의를 계기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는 늘 그들과 함께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노회찬의 꿈은 이때 한국사회의 든든한 왼쪽 날개를 펼치는 것이었으리라. 극우 반동의 무리가 우를 참칭해 왔던 세월을 이겨 내고 이제야 제대로 된 왼쪽 날개를 펼쳐야 할 때 그가 떠나가서 더욱 아쉬울 따름이다. 많은 시민이 그의 빈소를 찾아간다. 그는 여전히 활짝 웃는 얼굴로 사람을 맞는다. 정말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 떠나고서야 또 뒷북을 친다. 참으로 선한 사람이 선한 정치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정치의 환경을 돌아보게 한다.

그는 유서에서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이라고 했지만, 아무것도 멈춘 것은 없다. 많은 이가 약자의 벗이요 아름다운 정치인 노회찬을 기억할 것이며, 그가 꿈꾸었던 세상을 더욱 키워 갈 것이다. 그는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며, 그가 꾸었던 진보정치의 꿈 또한 많은 이의 마음 안에서 이어지고 커 갈 것이다.

우리 시대의 착한 사마리아인 노회찬 의원은 하느님의 품 안에서 깊은 안식을 얻을 것이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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