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수액은 그럼에도 흐른다

(윌리엄 그림)

일본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작품 “침묵”과 이것을 바탕으로 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에는 17세기 일본에서 배교한 한 예수회 사제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일본에의 선교는 실패했는데, 박해 때문이 아니라 일본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바를 실제로 믿기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연장자인 페레이라는 자신의 예전 학생이던 로드리게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시 일본인들이 믿었던 것은 우리의 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신들이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를 깨닫지 못했고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굳게 믿었다. .... 처음부터.... (일본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신을 바꿨고 뭔가 다른 것을 만들어 냈다. .... 일본인들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왜곡해 낸 것을 믿었다.”

일본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 소설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은 아마도 페레이라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부분이다. “이 나라는 늪이다. .... 네가 이 늪에 묘목을 심을 때마다 그 뿌리들은 썩기 시작한다. 잎들은 노랗게 변해 시든다. 그리고 우리는 이 늪에 그리스도교라는 묘목을 심었다.”

페레이라는 물론 틀렸고, 엔도가 공유했을지 모를 그 생각은 잘못됐다.

서양 선교사들은 당시, 그리고 아마 지금까지도 (일본에) “그리스도교의 묘목”을 심지 않았다.

그들이 그리스도교의 묘목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상은 오래 전에 유럽의 습지에 심어져 페레이라가 말하는 것에 가깝게 변형을 거친 그리스도교의 묘목에서 나온 새끼 묘목이다.

페레이라는 자신에 대해, 그리고 오늘날의 서구인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유럽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바꿨고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서구인들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믿지 않고 대신에 자신들이 왜곡한 하느님의 모습을 믿는다.”고 말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우리는 그토록이나 우리가, 페레이라처럼, 진짜 하느님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왜곡된 그 모습에 익숙해져 있다.

이 하느님의 모습은,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미켈란젤로가 그렸든 아니면 한 만평에 나오듯 긴 머리에 수염이 난 백인이 손에 번쩍이는 번개를 쥐고 구름 사이에 있든 간에, 그리스도교보다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신의 모습에서 더 영향을 받았다.(그의 수많은 성적 탈선 행위는 빠졌지만)

그리고 이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은, 시각적으로 표현되지 않을 때는, 대체로는 그리스 철학, 또는 다른 지적 추상개념의 확고한 전달자가 된다.

윌리엄 그림 신부 (사진 출처 = UCANEWS)

하느님에 대한 일반적인 서구의 생각은 대개 산타클로스와 교통경찰이 합쳐진 것이다. 친절하고 관대한 늙은 괴짜노인, 하지만 교통위반자를 찾으려 눈을 크게 뜬 사람.

그렇다면, 뿌리인 이스라엘의 신앙까지 파 내려가 돌아가면 혹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왜곡된 하느님의 이미지를 씻어 내고 이 신앙의 묘목이 제대로 자라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불행히도, 그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심지어 성경조차도 하느님에 대해 여러 다양한 모습을 싣고 있다. 창세기에서는 정원을 거니는 이로 나오고, 이사야서에서는 (강력한 권력을 지닌) 동방세계의 군주가 되며, 신약에서는 이 땅에 강생하여 십자가에 매달린 이가 된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신앙의 씨도 또한 축축한 땅에서 구불구불하게 자란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지니고 살려고 애쓰기를 포기해야 하는가? 쓸모없는 짓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시대마다 성인들이 있어 왔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묘목 덕분이든 아니면 그런 묘목이 있음에도 그랬든 간에 그 묘목 아래에서 자신들의 삶을 성스럽게 살았다.

올해는 엔도 슈사쿠가 썼던 일본에서의 천주교 박해 가운데 마지막 박해의 150주년이다. 생각만큼 그리 먼 일이 아니어서, 자기 할아버지가 그때 죽은 한 여인을 내가 알 정도다. 가족들이 다 찢겨 흩어졌고, 3414명의 신자가 일본 전역의 오지 마을로 추방됐다. 이들 가운데 20퍼센트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들의 추방 생활 중에 무언가 페레이라를 놀라게 했을 일이 일어났다. 이들 남녀와 아이들은 그들의 동료들이 오래전에 심었고 일본의 늪지에서 다른 모습이 된 그 묘목의 열매들이었고 그 자신들이 또 묘목을 심는 이들이 되었다. 이들은 쫓겨 간 여러 마을에서 참을성과 친절함으로 그곳 주민들을 감화시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했다.

예수는 각자의 열매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신앙의 나무는 모습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그 모든 나무에 들은 생명의 수액은 열매를 맺을 능력도 갖고 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들과 이해들은 분명히 불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와 이해들은 우리가 지성과 신앙, 그리고 기도로써 그 생명의 수액에 접할 수 있는 한 두 번째로 중요할 뿐이다.

우리가 지금 유럽 출신이 아닌 교황을 갖고 있다는 이점들 가운데 하나는, 그 유럽식 묘목, 즉 그 역시도 신비를 불완전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인 그 하느님 이해와 이미지는, 신앙의 과수원에서 이제 더 이상 하나뿐인 “공식” 작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심지어 현대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 마주친 과제는 우리의 다양한 묘목들 안에서 생명의 수액을 찾아내어 열매를 나게 하고, 그럼으로써 아직 어린 새 묘목들, 하느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표현할 새 길들의 원천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회, <아시아가톨릭뉴스> 발행인.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기사 원문: https://www.ucanews.com/news/endos-error-and-ours/8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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