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0월 2일(연중 제27주일) 루카 17,5-10

사도들이 주님께 청을 드린 게 무엇인지 꼼꼼히 따져 본다. 믿음을 더한다는 게 무얼까 수십 번 되묻다가 ‘더하여’라는 말에 한참 머문다. 그리스말로 ‘프로스티테미(προστίθημι)’인데 ‘기존에 존재하는 것에 다른 무엇을 보태다’의 뜻이다. 이를테면, 신앙이라는 게 이미 있었고 사도들은 거기에 더한 무엇을 요구하는 셈이다. 신앙은 자꾸만 성장하고 발전해야 하는 것일까? 예수는 사도들의 신앙에 무언가 더 보태어 주실 텐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도들의 바람은 거부된다.

예수는 무화과나무가 바다에 심길 수 있는 걸 겨자씨만 한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답한다. 대개 겨자씨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신앙이 크고 깊지 않아도 제대로 된 신앙이 있으면 뭐든 가능하리라는 판단을 하게 되고, 이어진 대개의 기도는 겨자씨만 한 신앙이라도 주십사 청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과연 그럴까. 겨자씨는 믿음의 크고 작은, 혹은 깊거나 얕은 측정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일까. 오히려 어떤 믿음이라도 존재하는 것이라면 뭐든 가능하다고 이해하는 게 맞지 않을까. 예수는 신앙을 겨자씨에 빗대어 설명하였지, 겨자씨의 ‘성장’과 ‘발전’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게 아닌데 말이다.

밭에서 일한 종의 비유도 그렇다. 열심히 일하고 주인에게 충성하는 종의 가치를 굳이 끌고 들어올 이유는 없다. 종은 종으로서 밭이든 식탁에서든 제 일을 했을 따름이다. 주인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종의 신분에서, 그 삶의 일관된 방식에서 예수는 신앙을 이야기하고 싶은 게다. 밭이든 식탁에서든 그 어디에서든 종은 종으로서 살면 된다. 더 나은 종의 삶, 더 나은 신앙적 삶은 어쩌면 존재치 않는다. 지금 어찌 사는가, 지금의 자리에 늘 내일의 자리를 끌고 들어와 뭐가 뭔지도 모르고 사는 게 아닌가. 그리하여 지금을 잃어버린 채 지금을 반성한답시고 신앙을 더해 달라며 예수에게 따지듯 청을 드리는 게 아닌가.

▲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가.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산다는 걸, 신앙하는 것으로 작정하고 시작한 게 사제의 삶이다. ‘잘’ 살아야 한다고 늘 다짐하며 ‘지금은 아닌데....’ 하는 실망과 후회, 그리고 반성이 적절히 혼합된 이도 저도 아닌 거짓투성이의 생활을 근근히 꾸려가고 있는 지금이 꼴에 신앙한다고 작정한 삶의 결과다. 제 방에 틀어박혀 글로써 세상을 재단하고 좌익 인텔리인 양 설쳐 대는 것도 조금은 스스로에게 식상한 지 오래다. 과연 나는 신앙하는 것일까. 제대로 잘 사는 것일까. 지금 사는 꼴을 스스로 거부하고 단죄하는 건 아닐까.

종은 주인에게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쓸모없다’라는 뜻의 그리스말은 ‘아크레이오스(ἀχρεῖος)’인데, ‘이익을 내지 못한다’라는 의미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무언가 덧붙여 만들어 내어야만 ‘잘’한다는 사상적 편향은 거부되어야 한다. 이익이 없고, 덧붙여지는 게 없더라도, 그리하여 지금 꼴이 못마땅하고 모자란 듯해도, 그게 신앙이다. 신앙은 하느님을 흔적으로 담아 내는 것이지, 하느님을 그대로 드러내는 삶이 아니다. 완전함에 대한 성장주의적 지향이 신앙을 더럽히고 모독한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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