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섭 신부는 2013년 4월 4일과 6월 11일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 해고자 분향소 철거를 막던 중 공무집행방해죄, 같은 해 12월 28일 민주노총 총파업에 참여했다가 일반도로교통방해죄로 기소돼, 2016년 9월 28일 1심 재판을 받았다. 검찰은 이 세 건과 관련해 병합 벌금 700만 원을 구형했다. 분향소 철거 반대 집회와 관련해서는 김정우 지부장 등 연대 시민 8명도 함께 기소됐다.
이 진술서는 이번 1심 재판에서 제출한 것이며, 선고 공판은 11월 2일 오후 1시 50분 중앙지법 고등법원에서 열린다.

존경하올 판사님께.

존경하는 판사님, 잘 아시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양심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정의하는 양심은 “함께 안다”는 뜻으로 즉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안다는 것이며 전통적으로 교회는 하느님의 목소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양심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양심을 통해 법을 발견하며 이 법은 언제나 선을 사랑하며 행하고 악은 피하도록 하느님이 새겨 준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이 새겨 주신 법을 우리 인간은 마음에 간직하며 그 법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존중하는 올바른 양심을 지닌 것이라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의 양심은 인간의 존엄과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거룩한 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2013년 4월 4일 목요일이었습니다. 그날 이른 새벽 미사 강론을 준비하면서 그날의 복음의 내용은 일생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이 죽은 후 부활하고 나서 얼마나 당신의 제자들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눈에 밟혔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라고 묵상을 했습니다.

그 복음 내용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한 후 제일 처음 했던 말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였습니다. 그러면서 저 또한 제일 먼저 떠올렸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은 2009년에 정리해고가 되어 길거리에서 고단한 삶을 보내야만 했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한없는 연민으로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준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날 새벽 미사를 봉헌한 후 대한문 앞에 설치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스물두 분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넋을 기리는 분향소와 삶의 공간인 천막이 중구청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를 당하고 있다는 아주 다급하고 긴박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또다시 망연자실하며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삶의 희망을 잃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걱정되어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대한문에 도착하는 동안 그날의 복음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라는 말씀을 연신 되뇌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평화는 쫓겨난 일터로 다시 돌아가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에게는 그런 평화가 허락되지는 않았습니다. 2009년 정리해고를 당하면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2013년 자신의 동료들과 그의 가족 스물두 분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 공장에서 22명이라는 고귀한 생명을 잃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과연 어떤 희망이 있었을까요? 매일매일 눈을 뜨면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기쁨과 설렘이 아니라 일터를 잃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 고민이 더 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서 지치고 고단한 삶을 보내야만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살아 있다는 희망보다는 죽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유혹과 엄청난 고통 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오죽 살고 싶었으면 자신들의 고통에 대해 울부짖으며 서울 시내 한복판 대한문 덕수궁 앞에 풍찬노숙을 하면서 외쳤을까? 싶습니다.

한 초등학교에 독감으로 단 한 명의 생명을 잃게 되면 방역을 책임지고 있는 국가는 잔뜩 긴장을 하며 어떻게든지 그 죽음이 확산되지 않도록 막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물며 한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해고된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이 무려 스물두 분의 귀중한 생명을 잃었는데도 국가는 이들에게 무관심으로 철저히 일관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었다면 이들의 죽음을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기업과 국가는 그저 기계적인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어쩌다가 이 사회에는 인정과 연민이 없는 비정과 야만의 사회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비정과 야만의 사회임에도 자신들의 고통을 도와줄 거라는 희망으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비장한 심정으로 대한문 앞에 22명의 영혼의 넋을 기리며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하고자 그리고 살고자 천막을 설치한 것입니다.

그렇게 천막을 치고 있는 동안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책임져야 할 기업과 국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아니 지금의 대통령은 심지어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해고와 그리고 이 부당한 해고에 대해서 국정조사를 실시하여 이들의 아픔을 해결해 주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치며 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제가 이렇게 법정에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중구청은 미관상 좋지 않다며 대한문 앞에 설치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추모 분향소를 강제철거한 후 그 자리에 화단을 설치하였습니다. 그 상황을 보면서 너무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함께 살자고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이들의 절절한 호소를 철저히 무시한 채 저리 무자비하게 쫓아내 놓고 과연 그 자리에 무슨 생명을 키울 수 있을지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저는 중구청의 반인륜적 행태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갈 곳이 없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정착하며 겨우 희망을 찾았던 그 자리에 이들을 쫓아내고 화단을 설치한 짓을 말입니다.

그래서 2013년 4월 4일 그리고 6월 10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분향소가 있는 대한문으로 달려갔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화단의 적법성을 제 양심과 하느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인정하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화단의 설치에 있어서 순수한 목적과 동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구청이 화단을 설치한 이유는 갈 곳 없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쫓아내기 위한 불순한 술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참으로 아름다운 관용과 자비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진정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용과 자비는 우리 인간이 지녀야 할 가치이며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제가 피고인의 신분으로 있게끔 한 이 사건을 통해 기업과 국가에게서 그런 덕목과 희망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희망없는 사회에 작은 씨앗이 되고 싶었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이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하는 것이 바로 고통받는 이들을 보고서 눈물을 흘려야 했던 그런 예수님의 연민의 마음을 이 각박한 세상에 뿌려 서로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이라는 열매를 맺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저함 없이 그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의 현장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저는 지금 이 자리가 결코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는 해야 되는 일을 양심과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실하게 이행했으며 무엇보다도 공소장에 나오는 경찰들에게 어떠한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법리적인 해석으로만 본다면 제가 법을 어겼다는 결론이 도출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온다면 저는 언제든지 그때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제가 속한 가톨릭교회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 슬퍼할 수 있는 능력을 제거해 버렸다며” 이 무심한 세상을 개탄해 하며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관심을 촉구하였습니다. 저는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삶에서 바로 십자가의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한 예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톨릭 신부인 제가 어떻게 이들을 외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요즘 '밀정'이라는 영화가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습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의 강점기이며 조국의 해방을 두고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가 변절과 배신을 거듭하다가 끝내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마음을 깊이 울리게 하는 그리고 곱씹을 필요가 있는 기억에 남는 명대사가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양심을 지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변절을 하는 이들도 참 많았습니다.

영화 대사 중에 그런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잘 알고 있는 독립운동 의열단장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사람의 말은 물론이고 내 말도 믿지 못하겠소, 나는 다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믿을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저 역시 가톨릭 신부로서 양심과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 그리고 마땅히 해야 되는 일이 올바른지 충분히 식별하며 행동을 하였습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울산에서 근무하고 있는 어느 동료 판사님께서 얼마 전 판결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있다는 현실은 서글프기 그지없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삶이 어디 저녁에만 있겠습니까? 저녁뿐만 아니라 아침도 걱정해야 되는 이들이 바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비롯한 이 땅에 모든 해고노동자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로 최후 진술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길을 가다가 무자비하게 강도에게 맞아 피를 흘리며 초주검이 된 이웃을 보고도 외면한 사제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준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홀대를 받았던 착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는 위험 중에 있는 어려운 이들을 당연히 도와주도록 하는 착한 사마리아인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리 중에 사회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회교리는 복음의 정신에 따라 그 시대의 징표들을 해석하여 사회 온갖 문제들을 성찰함으로써 교회와 신자 개개인이 어떤 태도로 다양한 사회 문제들을 식별하고 판단하며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담은 내용입니다.

이러한 사회교리 중에는 공동선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 연대성의 원리라는 세 가지의 원리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착한 사마리아인법은 연대성의 원리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대성의 원리는 “개인들 간에 개인과 사회, 민족들 간에 상호의존과 유대를 바탕으로 서로 책임을 지고 돌보아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이러한 연대성의 영적인 힘은 바로 이웃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내놓으며, 화해하고,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연대성의 원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도와주는 사회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저를 포함한 8명의 피고인들은 각자 삶의 자리와 직업 그리고 종교는 다르지만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인간의 양심에 따라 사회적 사랑인 연대를 실천한 것이며 개인적으로 저는 하느님과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피고 8명에 대해서 단순히 행위의 결과만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왜 우리가 대한문으로 달려가야만 했고, 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연대를 해야만 했는지 그 동기와 과정을 종합적으로 충분히 봐주시고 결과인 선고를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솔직히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저 역시 수도자이기는 하지만 허물이 커서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성인(聖人)이 되어야 하는데 쉽지가 않기에 다만 고통을 받는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는 비겁한 사제가 아니라 이들을 도와주는 착한 사제가 되고 싶은 게 저의 삶의 목표입니다.

마지막으로 존경하는 판사님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만일 저의 행동이 유죄로 인정된다면 벌금형이 아닌 징역형으로 선고해 주시길 정중하게 요청드립니다. 설령 벌금형이 선고되더라도 내지는 않겠습니다. 그 벌금으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서 사용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벌금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또 다른 소동을 일으키고 싶지가 않습니다. 부디 저의 간절한 바람 외면하지 마시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판사님과 재판을 도와주고 있는 실무자 모든 분들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진심으로 다시 한번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며 늘 삶에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길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6년 9월 28일 수요일
피고인 서영섭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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