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노동절 기념 토론회 토론-1]

▲ 김정대 신부(예수회, 노동자쉼터 '삶이 보이는 창' 대표)

나는 약정토론에서 '권위' 문제를 중심으로 교회내 사업장을 공동체의 관점에서 바라보겠다. 교회내 사업장은 단순한 이익집단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공동체성이 강한 곳이며, 올바른 권위가 행사되어 공동체와 개인이 모두 행복한 일터로 만들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사회 안에서 가톨릭계 병원들 역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시설투자를 해야하고, 투자한 만큼 이윤을 얻어야 하므로 상업화될 수밖에 없다.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의 경우에도 학교가 자본시장에 던져진 뒤에 우리나라에서 몇번째 학교라는 말만 남고 고유의 정체성은 사라졌다. 병원도 마찬가지로 시장논리에 따라 비용절감을 위해 비정규직 늘리고, 구성원에겐 희생을 강요한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본래 선교목적이나 정신을 상업주의에 넘겨준 꼴이며, 결국 그 공동체가 갖고 있던 고유한 권위가 사라진다.

한편 사업장 최고권력자의 권위 역시 성숙하지 못하다. 일반사회에선 본인이 쟁취해서 직분을 얻지만, 교회에선 자기가 잘나거나 쟁취해서 얻은 직분이 아니라 사제이기 때문에 거저 권력과 직분을 얻는다. 사제는 결국 공동체가 주는 권위에 기초하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사람을 위해 권력을 나누어야 한다. 이걸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면 권위주의가 된다. 

한편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다른 집단보다 감정적 상처를 더 쉽게 받는다. 가톨릭사업장의 신자노동자 가운데는 냉담률이 높은 데 정작 교회 사업장 안에서 선교가 안 되는 것이다. 그 직장 사람들에게 '좋은 직장'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공동체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갈등상황을 받아들이는데 훈련되어 있지 않다. 이른바 사제와 수도자는 이상적인 사람들이라 먼저 고개를 숙이는 '비굴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비굴한 사람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제들은 생활이 보장되어 있어서 문제가 없지만, 노동자들은 가족의 생계문제가 달려 있어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이들이 인생과 사람을 대하는 폭이 더넓은 것이다. 나도 사제지만, 사제들이 오히려 옹졸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가톨릭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투쟁시에도 사제나 수도자들에 대한 인신공격을 자제해야 한다. 사제나 수도자들은 상처받기 쉬우며 한번 마음의 문을 닫으면 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교회 사업장에서도 사용주측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권위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인천성모병원 사례에서 보듯이 갑자기 조합원 숫자가 줄어든 것은 결국 병원측의 강요에 의한 탈퇴라고 봐야 한다. 교섭에 제대로 응하지 않는 것도 노조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측면에선 비록 병원측이 강남성모병원처럼 비정규직을 인정한다 해도 차별이 남아 있다면 차별받는 이들에게 충성심을 기대하기 힘들다. 해고의 경우에도 교회는 법을 지켰다고 하지만, 법이란 최소한의 것이지 교회로서 언제나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교회는 '법보다 사랑'이 통하는 사회여야 한다.

 

김정대 신부 토론문 (전문)

일반 기업과 같은 사업장은 자본주의의 본질에 충실하여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이런 면에서 그 집단 구성원을 배려하는 공동체성이 약할 수 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내의 사업장(학교, 병원 등과 같은 사업장)은 단순한 이익집단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일반 사업장보다 어떤 의미로 공동체성이 강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늘 공동체와 개인 간의 긴장은 존재한다. 문제는 공동체도 행복하고 개인도 행복한 사회가 건강한 집단이다. 어느 하나를 강조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토론에서 가톨릭교회 내의 사업장에서의 건강한 노사관계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도록 초대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공동체성을 이야기 할 때, 공동체의 권위, 공동체 내에 최고 결정권자의 권위, 그리고 각 구성원의 권위가 있는 그대로 인정될 때 공동체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공동체의 권위는 그 공동체가 본연의 일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권위가 있고 없음을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회 내의 학교는 가톨릭 정신에 의해서 그 학교가 운영되고 그 정신이 학생들에게 전달이 되는지를 물어야 한다. 만일 그 학교가 이에 충실하다면 그 공동체는 매우 권위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일반 학교와 다를 바가 없다면 그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옳은지 포기해야할 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또 병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병원이 가톨릭정신에 맞게 운영되고 구성원들이 그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일을 하는지에 따라 그 병원 공동체의 권위가 인정될 것이다.

또 최고 결정권자의 권위 역시 중요하다. 이는 단지 이 지위의 권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의 인격적인 면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 지위가 지닌 권위는 지극히 기능적이기 때문이다. 이 기능에 지혜와 관용까지 포함된다면 최고 결정권자는 권위를 올바로 사용하고 이는 모두를 위한 권위가 된다. 그러므로 이 권위가 권위적일 필요는 없다.

마지막으로 공동체 구성원의 권위 문제이다. 역시 공동체 구성원이 각자의 위치에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도록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느 한 개인이나 공동체 내의 한 단체가 너무 좌절을 경험하게 한다든지 무시당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그 공동체는 건강한 집단으로 남아 있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의사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공동체의 권위에 대한 질문

현대 한국 사회는 매우 경쟁적이다. 그리고 모든 것에 자본의 논리와 경제적 효율이 우선한다. 과연 이런 사회문화적 구조에서 가톨릭정신을 유지하면서 사업장을 운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어려움이 있다면 그 어려움이 무엇인지 밝히고 가톨릭교회 구성원의 지혜를 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최고 결정권자의 권위에 대한 질문

일반 사업장의 최고 결정권자는 매우 권위적인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어떤 노동단체의 최고 결정권자도 권위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내의 사업장의 최고 결정권자는 이와 비교가 되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구성원과 만나 많은 대화를 갖고 그들의 원의를 가능한 범위 내에서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면 좋을 듯 하다.

공동체 구성원의 권위에 대한 질문

공동체 구성원의 권위가 인정되는가? 특히 노동조합이 있을 경우 그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가? 그들에게 책임을 묻되 권리를 인정하는가? 구성원들 사이의 차별은 없는가? 노동에 대한 대가로서의 보수는 적당한가?

어느 집단이든 공동체와 개인 사이의 긴장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 간극을 줄이려는 노력이 없다면 더 큰 갈등으로 진화한다.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정신을 추구하면서 행복하고 구성원은 그 안에서 그 일에 협조하며 행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서로의 권위를 인정하며 대화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현명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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