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지난 3주간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한 작은 시골 마을인 컴버미어의 ‘마돈나 하우스’라는 수도공동체에서 생활했다. 러시아 난민 출신 여성이 설립한 이 공동체는 평신도들과 사제가 모여, 성모님과 요셉 성인, 어린 예수님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나자렛의 삶’을 지향하며 검소하게 살아가는 곳이다. 온타리오 주는 캐나다의 동남쪽에 있고 따라서 미국 국경과 가까운 편이다. 그래서인지 마돈나 하우스 구성원의 절반은 미국에서 온 미국인이거나 미국과 캐나다 시민권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안 그래도 서로 밀접한 나라인데 미국인이 절반이나 되다 보니 요즘 식사 때마다 트럼프와 힐러리의 이야기는 늘 나오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나의 전공이 정치학인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으레 이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그래서 너는 힐러리와 트럼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아직 학부 졸업도 안 한, 수박 겉핥기도 채 끝내지 못한 내가 영어로 뭐라고 답하겠는가? 우리나라 언론에서 하는 말을 몇 개 빌려 트럼프가 그다지 대통령이 될 능력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물론 내가 트럼프라는 인물에 대해 좋지 않은 편견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힐러리보다는 차라리 트럼프가 낫다는 사람이 꽤 많았다. 아니, 사실 피부로 느끼기엔 이 사람들로만 투표를 부친다면 트럼프가 이길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정말 다양했지만 가장 먼저 나오는 일반적 이유는 ‘낙태’였다.

북미 사회에서 낙태는 정말 중요한 정치적 이슈다. 마치 우리나라 정치의 이념을 가르는 몇 가지 중요한 갈등의 축으로 안보, 복지 등이 있듯이 그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들은 이 이슈를 ‘Pro-choice’, ‘Pro-life’라고 표현한다. 낙태를 여성의 선택으로, 그래서 ‘낙태’가 아닌 임신 중단이라는 개념으로 보느냐 아니면 태아는 엄연한 생명이고 이것은 한 인간의 생명권이며 신의 영역으로 보느냐에 따라 낙태 찬반이 엇갈린다. 보수적인 공화당은 프로 라이프를, 진보적인 민주당은 프로 초이스를 지지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각자가 보수, 진보라는 개념에 얼마나 서로 다른 프레임을 가지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프로 초이스, 프로 라이프는 보편적으로 쓰이는 개념이며 단어이고 이것은 사람들에게 가까운 영역이다. 가깝다는 표현을 설명하는 예는 여기 있다. 나는 한국에서는 24살이지만 캐나다에서는 아직 22살이라고 말하면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태어나자마자 이미 1살로 친다고 말하자 한 또래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 한국인들은 참 프로 라이프를 지지하는구나!”

이러한 배경을 고려해 보면 이곳 사람들이 힐러리보다는 트럼프가 낫다고 많이들 말하는 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톨릭 신자로서 나자렛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프로 초이스가 웬 말인가. 한 생명의 잉태가 어디 사람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인가. 나는 결코 가톨릭-> 프로 라이프-> 공화당 -> 트럼프라는 알고리즘이 작용했다고 보지 않는다. 나는 가톨릭이니까 트럼프야! 이건 말도 안 되는 바리사이다. 그 전에 우리가 생각해볼 점은 낙태가 사회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논쟁적으로 토론하는 주제라는 점이다. 또한 북미권 사람들이 ‘신의 영역’이라는 개념을 정치 영역에서 망설이지 않고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차이를 느꼈다. 수도공동체인 마돈나 하우스 사람들이 일반 유권자보다 더 열심한 가톨릭이며 일반화하기 힘든 유권자라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나는 개인적으로 이 문화권 사람들은 생명, 가정, 종교를 우리나라에 비해서 더 중요한 이슈로 가진다고 느껴 왔다. 낙태 이슈는 그것이 표면에 드러난 한 예다.

▲ 미국에서는 대통령 취임식때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올려 놓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so God, help us."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이런 것을 느꼈던 가장 대표적 순간 중 하나는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을 보면서였다. 취임 선서때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올려 놓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so God, help us.” 이것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이고 연방 헌법에는 취임식 관련 법안이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오는 것은 유권자들, 즉 미국인들은 대통령이 될 사람이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한 신실한 인간이길 기대한다는 것을 뜻한다. 몇 년 전 미국 정치 수강 중 교수님의 한마디가 참 와닿았었다. 미국 정치인이 자기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보다는 차라리 이슬람교라도 믿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훨씬 나은 선택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자, 이제 우리나라 대통령이 취임식 때 성경이나 불경에 손을 올려 놓고 똑같은 행동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하늘이시여 도우소서.’ 다음 날 신문 1면은 그 한마디로 도배될 것이다. 최근 들어 무신론자 비율이 늘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크리스천의 나라다. 성경에 손을 올리는 것도 오랜 전통이기에 유지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 그대로 대입해서 비교해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러나 사람들이 종교의 영역을, 신의 영역을 비이성적 영역과 동일시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이 부러웠다. 이건 서양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무조건 멋있다고 서양을 찬양하는 그런 태도와는 다르다. 정치라는 것이 무조건 인간의 이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그 전제가 너무나 부러운 것이다.

분명 인간의 역사에서 종교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켰던 시절이 있었다. 종교가 종교 이상의 영역을 침범해서 마구 권력을 휘둘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 그런 역사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종교는 종교일 뿐’, 일주일에 하루는 종교인이고 나머지 엿새는 비종교인으로 사는 태도는 옳지 않다. ‘나는 트럼프도 힐러리도 싫지만 하나를 고르라면 트럼프를 뽑겠다. 적어도 트럼프는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에게 그것은 참 중요한 가치다’. 식사 중 미국에서 온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에게 종교란 일요일에 성당에 다니고 청년회 활동을 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삶의 가치관을 만드는 아주 중요한 배경인 것이다. 가톨릭이라서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아니. 트럼프가 태아를 존중하는 태도를 지지한다고.

더 간단하게 생각하면 종교란 사람들이 만든 개념이고 붙인 이름이지 사실 그 핵심은 신에 대한 믿음, 사랑,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려는 의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믿음, 사랑, 의지를 이성의 영역에서 마음껏 표현하고 토론하는 게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나부터도 당장 신자가 아닌 사람과 밥 먹을 때 성호경 긋는 것이 그렇게 힘든데 말이다.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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