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5월 1일(부활 제6주일) 요한 14, 23-29

오늘 복음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믿던 바를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안에 말씀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인 안에는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들 안에서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기에 초기 신앙인들은 그분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도 그 생명이 하신 일을 실천하면,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산다고 믿었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정녕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듣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어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 안에 성령이 일하셔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살아 계시게 하며, 그분이 하신 일을 기억하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인간 안에 일어나는 변화와 새로움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성령은 인간 안에 또 인류역사 안에 예수님을 따르는 새로운 삶을 발생시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 시대 유대교가 하느님이 버리셨다고 외면하던 병자들을 고쳐 주어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병고는 죄에 대한 벌로 하느님이 주셨다고 믿던 유대교 사회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면서, 하느님은 인간을 단죄하고 벌주지 않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도 행복해야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그런 일련의 일들은 유대교 사회에서는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새로운 역사가 인류 안에 시작한 것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그 새로움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얽매여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유대교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통치자의 땅에 사는 사람은 통치자의 법을 지켜야 하듯이, 하느님의 땅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도록 초대하는 지침이지,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아 노예와 같이 맹종하며 살게 하지 않는다고 예수님은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사람은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새로움입니다.

▲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는 예수. 이탈리아 몬레알레 대성당에 있는 비잔틴 모자이크.(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마르코 복음서(3,1-6)에 따르면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유대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 하나를 회중 앞에 세워 놓고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악한 일을 해야 합니까? 목숨을 구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까?” 회당의 회중은 침묵만 지킵니다. 유대교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도 노동이라고 금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날이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을 하지 않고,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선한 일,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그것도 그 시대에는 새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고 비난하던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가난한 이, 병든 이들을 위해 수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버린 이들이라, 그들도 버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죄인이라 부르고, 간음한 여인을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칩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만든 법과 제도와 그들의 권위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그런 것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희생시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그런 희생이었습니다. 오늘도 자기의 권위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법을 빙자하여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믿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통용되는 대죄 혹은 조당이라는 말이 사람을 살리는 것인지, 죽이는 것인지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깨달은 제자들은 그분이 보여주신 새로움을 실천합니다. 그들은 그 새로움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경직된 유대교를 떠나 자비하신 하느님이 살아계신, 성령의 공동체를 발족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죽음을 넘어 부활의 미래를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느님이 여시는 미래를 신뢰해야 합니다. 새로움을 거부하는 것은 그 신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역사 안에 우리를 새롭게 가르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새로운 실천으로 기억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시대에 따라 새롭게 표현하고, 새롭게 실천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과거의 법과 제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은 역사 안에 살아갑니다.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를 절대화하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미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것이 절대화되는 곳에 사람은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숨결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사람을 살리십니다.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 섬김이 새로운 실천으로 나타나는 곳에 살아 계십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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