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쇤보른 추기경의 개혁 노력


크리스토프 쇤보른 추기경은 최근 어지러운 교회 상황에서 직설적인 발언을 아끼지 않는 추기경 중 하나이다. 로마 교황청이 위태로운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가 노력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라 전체의 신앙이 심각한 위기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 쇤보른 추기경
지도력 있는 수장으로 정평이 나 있는 크리스토프 쇤보른 추기경은 최근, 파면된 주교 네 명의 복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위기 상황에서 매우 두드러지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이와 같은 행동을 마치 정해진 길을 잘 가고 있는 배를 뒤흔드는 행위로 볼 수도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자비로운 처사의 수혜자 중에는 홀로코스트를 부인한 것으로 잘 알려진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가 있다. 교황청은 교황이 그의 홀로코스트 부인 사실을 몰랐다고 전한 바 있다. 이에 전 세계가 잇달아 격분했고, 당연한 이유로 독일어권 국가에서는 더욱 심한 반감이 일었다.

예의 독일어권 국가의 추기경 중 일부가 즉시 입장을 밝힌 가운데, 쇤보른 주교는 윌리엄슨 주교 사건을 다룬 교황청의 방식을 가장 먼저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이 부분에서 실수가 일어났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사람이 성직에 복권될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를 더욱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은 데 대해 바티칸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지적했다.

교회는 경제적 위기나 실업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공의회 결과 받아들이지 않는 논쟁에 휘말려...

뉴올리언즈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동성애자들과 낙태옹호론자들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던 게르하르트 마리아 바그너 신부를 린츠의 보좌주교로 임명한다는 발표가 있은 직후, 빈의 대주교이기도 한 쇤보른 추기경은 사제 및 유급성직자들에게 따뜻하면서도 명확한 요지의 편지, "위로와 용기의 글"을 보냈고, 이는 쇤보른 주교 자신의 교구에서 발행하는 월간 소식지 《테마 키르헤Thema Kirche》에 실렸다.

"지금 여러분 상당수가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 짐작됩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슬픔과 분노를 일으키는 일에 맞닥뜨렸습니다. 우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게 됩니다. 또다시 교회는 지혜롭지 못한 모습을 보였고, 그리하여 우리 또한 그렇게 보이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묻습니다. '꼭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가? 우리가 이렇게 될 만한 단서를 제공했는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는가?' 교회가 경제적 위기나 실업과 같이 현재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뜻을 모아야 할 시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적어도 공의회의 중요한 일부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소수에 관련된 논쟁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황과 교회가 잘못된 길 위에 있으며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가톨릭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지금 린츠의 새 보좌주교 문제로 촉발된 소요에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이 되며, 무력감이 느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 일요일, 바그너 신부는 교황에게 보좌주교 서품을 자진 철회하겠다고 밝혔고, 교황은 이를 받아들였다.

▲ 영국 가톨릭 주간지 <더 태블릿The Tablet>

교회 스캔들 해결하기에 바쁜 오스트리아 주교들

현재 오스트리아 교회가 당면한 위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바그너 신부의 임명 및 파면된 사제의 복권이라는 두 사건으로 더욱 불거졌는데, 이에 대처하는 쇤보른 추기경의 태도는 오스트리아 주교회의의 수장인 그가 얼마나 유능한 중재자로 기능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그에게는 1995년 빈의 대주교가 된 이후로 수많은 연습의 기회가 있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오스트리아에서는 연이은 문제있는 주교임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교회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교황청은 2~3년 사이에 지금껏 지역 교회와 논의 후 결정하던 주교 임명절차를 어긴 채 극보수주의적인 주교들을 다수 임명하였다.

상트푈텐의 전 주교인 쿠르트 크렌 주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 중 일부의 서품식이 진행될 때는 반대자들이 길에 드러눕고 길을 점거해, 성당에 진입하기 위해서 경찰의 호위가 필요할 정도였다. 1995년, 쇤보른 주교의 선임자이자 1980년대 가장 논란이 많았던 임명에 속하는 고(古) 한스 헤르만 그뢰어 추기경은, 이른바 ‘그뢰어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는 아동성추행으로 고소된 바 있었다. 그뢰어 추기경 자신은 물론 교황청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침묵을 지켰기에, 이 문제를 수습하는 것은 오롯이 당시 대주교였던 쇤보른과 다른 오스트리아 주교들의 몫이었다.

1998년 3월, 새로이 임명된 쇤보른 추기경과 현 그라츠 교구 주교인 에곤 카펠라리 주교, 그리고 지금은 은퇴한 오스트리아 주교 둘은 그뢰어에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도덕적 확실성"에 도달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그들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의 사목 업무에, "어린이들의 행복보다 추기경의 평판이 더 중요하다는 치명적인 의심으로 차질이 빚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를 공개적으로 표명할 의무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998년 6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 번째로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그뢰어 추기경은 교황의 내방 시기에 맞추어 독일로 피신했고, 쇤보른 추기경이 빈의 악명 높은 헬덴플라츠(1938년 3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안슐루스 이후, 히틀러가 열광하는 군중들에게 연설을 했던 곳)에서 교황을 맞이했다. "분쟁이 우리 교회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 많은 이들이 주교들이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 이는 교황과 주교들에 대한 민중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쇤보른 추기경의 말이다. 오스트리아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뢰어 사건에 대해 언급하기를 내방 내내 간절히 바랐지만, 교황은 쇤보른 주교에게 총대를 넘겼고, 그는 그 자신과 오스트리아 주교들이 "모든 일을 떠맡았다"고 공개적으로 시인해야만 했다.

2004년, 또다시 상트푈텐의 한 신학교에서 일어난 성추문이 전 세계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쇤보른 주교는 만일 로마 교황청이 오스트리아 주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러한 추문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쇤보른 추기경이 오스트리아 TV에 출연해 전한 바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주교들은 오스트리아 남부 교구에서 "심각하게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몇 달 앞서 교황청에 알린 바 있었다. 쇤보른 추기경은 교황청이 행동을 취하지 않은 데 큰 실망을 나타냈다. "지금껏 교황청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매우 분개합니다. 저는 슬픔과 분노를 숨길 수 없으며, 왜 오스트리아 가톨릭 신자들이 이러한 사태를 참아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개혁 필요  

추기경 자신의 사목과정은 순탄하게 이루어져왔다. 최근 보좌주교 임명은 정규적인 절차를 따라 진행되었고, 임명된 주교들은 묵묵히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고 있으며, 어떤 분쟁도 일으키지 않고 있다. 사제 수의 급격한 감소와 교구 대형화에 대한 우려가 높아짐에 따라 쇤보른 주교의 전 주교총대리이자 '카리타스 오스트리아'의 수장인 몬시뇰 헬무트 쉴러는 ‘오스트리아 사제회의(Austrian Priests' Initiative)’를 세웠다. 이들은 사제의 독신생활을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것과 자격이 인정된 기혼 남성에게도 사제직을 수여하는 것에 찬성하고, 결혼하여 사제직을 반납한 사제들을 복권시켜 각 교구에 사제가 다시 한 명씩 임명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쇤보른 추기경은 전체 교회를 고려할 때 오스트리아 교회가 독자적으로 그러한 개혁을 앞서 실시할 수는 없다는 점을 늘 강조하는 한편, 다양한 그룹과의 대화의 창구를 계속 열어놓고 있다. 최근 오스트리아 사제회의에 속해 있는 사제 상당수는 교황청의 다양한 결정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기 위해 교황청을 방문했다. 하지만 신앙교리성성(信仰敎理聖性)은 막바지에 약속을 취소했고, 이 소식을 접한 사제단이 쇤보른 추기경에게 연락해 결국 그가 교황청과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쇤보른 주교는 지금까지 위기 상황을 충분히 다루어왔지만,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다. 한편에는 극보수주의 가톨릭 신자들과 바그너 신부 지지자들이, 다른 한편에는 여성의 사제서품을 포함한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극진보주의 가톨릭 신자들이 있는 가운데, 그 사이의 깊은 간극은 쉽사리 메워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추문들로 깊이 각인된 상처들은 아직 채 낫지 않았다. 최근 교구 조사에 따르면 카리스마 있는 사제들이 평신도를 훌륭하게 통솔하는 교구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터뷰한 사제 중 한 명은 교회 내의 추문은 아주 경미한 것이라 할지라도 오래된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 셈이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교회로부터 신자들이 대거 빠져나가는 일이 또다시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교회 이탈하는 신자들 급증..

영국인들에게는 낯설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스트리아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를 공식적으로 떠날 수 있다. 세계 가톨릭 신자의 96퍼센트 이상이 의무적으로 교회세를 내지 않지만, 나머지 4퍼센트, 즉 독일어권 국가들의 가톨릭 신자들은 일정량의 세금을 교회에 내야만 한다. 오스트리아는 1.1퍼센트, 독일은 8~9퍼센트의 세금을 낸다. 만일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세를 내지 않거나 내기를 거부하면 소환되어 법원 집행관에게 벌금을 받을 수 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에서 그러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지만, 그래도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세를 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역 공공기관에 가서 스스로 교회를 떠날 것임을 서면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세례 증명서에 기록되며 그들이 세례 받은 교구에 알려진다. 그때부터 그들은 성사를 보거나 가톨릭식 장례를 치르는 등의 일을 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의 교회세 의무납부 제도는 1939년, 가톨릭 신자들을 교회에서 떠나게 하려는 방편으로 히틀러에 의해 도입되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세를 납부함으로써 교회가 정치세력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교회세를 내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교회의는 교회세 징수제도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1950년대에는 오스트리아 전체 인구의 95퍼센트가 가톨릭이었지만, 1970년대에는 다른 선진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세속주의와 상업주의, 개인주의가 팽배하기 시작함에 따라, 오스트리아에서도 ‘세례증명서상의 교인’이라 불리는 신자들, 즉 신앙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평균 약 3만5천 명이 해마다 교회를 떠나고 있다. 여기에 그뢰어 사건과 상트푈텐 성추문, 현재 당면한 위기와 같은 교회의 추문들은 이 수치를 더욱 급증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번에는 정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조차도 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보고되고 있는 만큼, 이 배를 바로잡기 위해 다시 한번 큰 인물의 기량이 요구될 것이다.

"위기란 언제나 결정과 분명함을 요구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위기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물론 편안하거나 고통이 없는 순간은 아닐 것이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비록 위기의 한가운데에서는 그렇게 보기 힘들더라도 말입니다." 쇤보른 주교가 <테마 키르헤>에 쓴 말이다. 오스트리아 가톨릭 신자들 대다수가 그의 말이 맞기를 희망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번역: 황근하 [영국 가톨릭 주간지 <더 태블릿The Tablet> 2009년 2월 21일자 특집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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