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3월 13일(사순 제5주일) 요한8,1-11

오늘 복음은 급진적이고 불온하다. 대테러 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한 작금의 대한민국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제 법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과 원칙에 벗어난다고 누군가가 나도 모르게 나를 판단하고 단죄하고 추적하는 세상이 대한민국의 오늘이니까.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법과 원칙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정당하게 그 여인을 붙잡았고 예수에게 데려왔다. 여인은 죄인이었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죽어야 했다. 법과 원칙의 입장에선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다.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법과 원칙이 그러하니까.

예수는 온 백성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가르치는 자는 적어도 법과 원칙을 가르쳐야 한다는 상식은 보편적인 것 같으나 예수에겐 아니었다.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할지 줄곧 물어 대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에게 예수는 법과 원칙의 상식을 말하지 않는다. 대꾸는커녕 외면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땅바닥에 무언가를 "쓴다"는 건, 무언가가 아직 쓰이지 않은 상태를 역전시키는 창조적 행위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쓴다"는 건,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것을 생각케 한다. 그건 분명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줄곧 캐묻는 "상식"과 다를 게 명확하다.

▲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가브리엘 메취.(1653)

돌로 쳐 죽여야 할 죄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은 당연해서 새로울 게 없다. 죽어야 할 죄인을 다른 차원에서,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건, 상식의 판을 엎어 보는 데서 시작한다. 예수는 다시 무언가 땅바닥에 쓴다. 법과 원칙의 상식에서 벗어난, 그래서 불온한 예수다.

예수는 법과 원칙을 거부한 게 아니라 법과 원칙의 외연을 확대시키고 있다. 사실 법이라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 인간 행동의 최대치를 규정하는 절대적 원리가 아니다. 최소한의 틀을 제공함으로써 법과 원칙은 새롭고 변화무쌍한 인간 삶에서 유연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예수는 여인에게 새로운 법과 원칙의 기준을 세우길 원한다. "단죄하지 않겠다. 다시 죄짓지 마라." 여인이 죄를 지을지 말지 그건 전적으로 여인의 몫이다. 예수는 여인을 보고 있다. 단죄받아야 할 여인이 법과 원칙을 새롭게 세울 주체로 거듭난다.

죄와 죄인은 다르다. 죄를 보고 인간을 소외시킨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죄를 거두고 인간을 바라본 예수와 대비된다. 법과 원칙으로 인간을 단죄하고 소외시키며 제거시키는 것이 정의로운가, 아니면 법과 원칙에 더 가까이, 더 충실히 다가설 수 있도록 인간을 다독이고 부추기며 새롭게 이끌어주는 게 정의로운가. 어느 것이 더 법과 원칙에 어울리는 것인가. 대테러 방지법을 통과시키키 전, 국회 안에는 필리버스터의 법과 원칙은 있었으되 듣고 말하고 논쟁하는 인간은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다. 피를 쏟듯 기나긴 시간 동안 분노하고 설득하고 울부짖던 몇몇의 국회의원은 인간이 소외된 현장에서 인간을 부르고 있었다. 법과 원칙이 인간을 소외시킬 때 그것이 테러가 된다. 무섭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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