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바트 어만, 강창헌 옮김, 갈라파고스, 2015

신화를 넘어, 역사적 예수를 찾아서

프랑스의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는 “그리스도교는 역사가의 종교”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다른 종교체계는 그 신앙과 제식의 토대를 인간이 출현하기 약간 앞선 시대의 신화에 두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인들의 성서는 사실상 역사책이며, 그들은 하느님의 지상에서의 삶에 관한 이야기나 교회와 성인들의 연대기를 기념하는 예배를 드린다. 어찌 보면 보다 깊은 또 하나의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종교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How Jesus Became God)는 매우 ‘그리스도교적’ 저술이다. 신화가 아닌 역사적 예수의 모습과 그 실체를 치열하게 파고든 책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예수의 복원은 지금의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성립했는지를 보여 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일을 맡은 저자 바트 어만은 신앙적으로 자신은 불가지론자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훈련받은 역사가로서 다양한 문헌 고증과 그것을 토대로 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추론,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긴 역사 속에서 어떤 사건과 사고, 승리와 패배가 있었는지 오롯이 그 ‘과정’ 자체에 집중한다.

▲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바트 어만, 강창헌 옮김, 갈라파고스, 2015
그 과정의 서술이 이 책의 내용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귀결은 제목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다시 말해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다.” 혹은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었다.”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급히 결론만 취하려는 독자에게 이 책은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하거나 섣부른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정답을 내놓는 수학문제를 풀 때조차 우리는 중요한 건 답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제목에 붙은 의문사 “어떻게”에 있다. 저자의 도발적 메시지에 ‘왜’라는 의문을 품고, ‘어떻게’라는 그 긴 과정을 차분히 따라가 볼 준비가 된 독자라면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롭고 유익하다.

바트 어만은 현학적 수사 없이 메시지를 최대한 명확하게 전달하고, 작품성(?)보다는 잘 정리된 개념과 구성을 중시하는 전형적 미국 학자처럼 보인다. 그는 먼저 신과 인간의 엄격한 구분, 서로 넘나들 수 없는 절대적 차원의 두 영역이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르크 블로크와 함께 프랑스 아날르 학파를 이끌었던 뤼시앵 페브르는 역사가의 가장 큰 죄악은 ‘시대착오’라 했는데, 저자 역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과 인간의 개념을 예수 당시에 적용하는 것은 오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만은 예수라는 인물 혹은 신을 지금이 아닌 그가 살았던 그리스, 로마의 문화적 전통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당시 신과 인간의 구분은 그렇게 엄격한 것이 아니었으며, 일부 특출나게 뛰어난 인간은 사후, 심지어는 생전에 신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점을 분명히 한 뒤, 저자는 예수의 ‘신화’가 사실상 하나의 ‘발전’이었으며 “신약 성서와 초기 그리스도교에 대해 지난 200년간 현대 학문이 중요하게 발견한 것 중 하나는 예수 생전에 추종자들이 그를 하느님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57쪽)라고 강조한다.

그런 다음 저자는 예수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네 복음서에 대한 분석을 진행한다. 그는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복음이 쓰인 순서와 각각의 내용, 그 특징을 분석하고 심지어는 복음서들이 집필을 위해 참고했을 말씀 자료 즉 숨겨진 전승 기록에 대한 부분까지를 갈라내 상호 대차대조표를 만든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롭고 기록을 다루는 역사가로서 저자의 능력이 최고로 빛을 발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해제를 쓴 오강남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것의 핵심적 결론을 정리한다.

“네 복음은 모두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네 복음서 중 서기 65-67년경 제일 먼저 쓰였다고 하는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의 하느님 아들됨이 그가 세례를 받을 때라 하고 있다. 그러다가 그 후 10-15년이 지나 쓰여진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의 하느님 아들됨이 그의 출생시로 당겨진다. 그러다가 다시 10-15년이 지나 90-95년경에 쓰여진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가 태초부터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창조에 참여하고 그 후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인간 예수가 신이 되었다고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신이 인간이 되었다고 주장한 셈이다.”(440쪽)

교회가 무오류라고 가르치는 이같은 성서 안의 불일치는 잠시 접어두더라도 그렇다면 예수가 인간에서 신으로 도약하게 된 결정적 계기, 혹은 처음부터 하느님이었다고 믿어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것이 예수의 ‘부활사건’이라고 말한다. 실제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부활을 전제로, 그 위에 성립된 종교다. 저자의 표현대로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예수는 유대교 역사 기록의 각주에 불과했을 것이다.”(158쪽) 예수 이전에도 예수와 유사한 혹은 예수보다 더 급진적 복음을 선포한 예언자들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2000년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열어젖힌,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현 인류의 가장 유력한 종교로 만든 장본인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의 몫이 되었다.

예수의 부활사건과 그리스도교의 성립

저자도 인정하듯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간단치 않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두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과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으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당시의 관습과 형법 절차에 따르면 십자가형을 받은 죄인은 사체가 부패하도록 내버려 두고 동물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것,(191쪽) 그리고 마치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린 비운의 총독으로 묘사된 빌라도가 ‘예수를 품위 있게 무덤에 매장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부패와 부정, 오만과 잔인의 통치를 행한 로마의 평범한 이류 총독’이었다는 것.(194쪽)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정확히 말하자면 복수의 기록과 연구를 통해 알아낸 사실들이다. 그리고 일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 그의 ‘환시’를 보았다는 것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224쪽) 이 환시로 말미암아 예수는 재평가되었고 결과적으로 하느님이 되었다.

그러나 그 환시가 정말로 예수를 본 것이었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다. 실제 부활한 예수의 환시를 본 사람들은 소수였으며, 당시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했다. 처음엔 그가 영으로 부활한 것인지, 육으로 부활한 것인지도 불분명했다. 그런 면에서 정설화된 육체의 부활을 주장한 것이 오직 루카 복음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부활한 예수의 승천 광경의 기록도 사도행전이 유일하다는 사실은 분명 우리의 주의를 끌만한 일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가장 중요한 예수의 육체적 부활과 승천이 왜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간략히 처리되었거나 아예 기술되지 않았을까. 이것도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극도로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그는 결국 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논증들, 추론, 다양한 정황들만을 설명한 채, “신앙은 역사적 자료가 아니며, 역사적 지식은 신앙이 아니다.”(206쪽)라는 말로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시한폭탄의 버튼을 꺼 버린다.

이 책의 후반부는 어찌됐든 예수 사후, 그가 부활했다는 주장과 믿음을 동력으로 삼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확산되고, 다시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을 기술한다. 2-3세기 예수에 대한 여러 관점들. 예수를 신이 아닌 단지 의로운 인간으로 본 ‘에비온파’,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된 것이라는 ‘양자설’을 주장한 로마의 ‘테오도로파’, 원래부터 신인 하느님이 인간 예수로 나타난 것이라는 ‘가현설’의 ‘마르키온파’ 그리고 구원은 믿음이 아닌 깨달음(앎)에서 온다는 ‘영지주의자’들까지, 초기 교회의 신앙적 스펙트럼은 꽤 다양했고 그중 대부분은 상호 충돌하는 것들이었다. 거기에 성령론까지 더해지면서 하느님과 예수, 성령, 이 삼자의 실체와 관계는 더욱 난해해지고,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들면 들수록 더욱 복잡해지고 모순이 생기는 역설적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런데 박해받던 그리스도교가 313년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고 하나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전화될 때, 이러한 혼란은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325년 약 318명의 주교가 지금의 터키에 있는 니케아에 모여 교회의 일치를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그 결과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미사 때마다 외우는 사도신경 또는 그 원형인 니케아신경이 바로 그 합의를 집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의 그리스도관으로 통합시키는, 다시 말해 신앙을 통일적으로 관리하는 합의의 근거이자 도구인 셈이다. 우리는 이 신경을 외우고 반복함으로써 무시무시한 이단에서 벗어난다. 즉 초기 교회의 다수가 지지했던 인간 예수가 아닌, 심지어는 역사적으로 예수가 한 번도 자신은 하느님이라고 말한 적이 없음에도, 하느님과의 ‘동일본질’로서 그 스스로 하느님인 예수를 우리 신앙의 절대적 대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 '예수의 승천', 벤저민 웨스트.(1801)
예수의 부활 혹은 ‘재맥락화’

이상이 바트 어만이 정리하는 예수가 신이 된 과정이자 지금의 그리스도교가 성립하기까지의 역사다. 이렇게 볼 때, 실제 4세기 니케아공의회 이후 교회는 일치를 이루며 수천 년을 지속해 온 것처럼 보인다.(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었지만, 니케아 공회의의 테제인 예수의 신성이나 삼위일체론을 문제삼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만의 관점은 뜻밖에 그렇지 않다. 그는 “니케아와 니케아신경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새 장의 서곡이었다.... 교회는 일치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치되지 않을 것이다.”(419쪽)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재맥락화’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나는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항상 예수를 재맥락화해 왔다고 주장하는 바다. 예수의 첫 추종자들은 예수가 죽음에서 일으켜졌고 하늘로 고양되었다고 믿게 된 이후에 예수를 재맥락화했다. 그들의 예수는 이전의 예수가 아니었으며, 그들은 자기들이 마주친 새로운 상황에서 예수를 이해했다. 예수를 묵시론적 예언자라기보다는 인간이 된 신성한 존재로 이해했던 2-3세기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항상 존재했으며 지위와 능력에서 하느님과 항상 동등했다는 입장을 견지한 4세기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가, 갈릴래아 시골길을 걸어 다니며 다가올 파국에 대해 묵시론 메시지를 설교하던 인물과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고 믿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예수를 재맥락화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했다. 예수 부활을 처음 믿었던 가장 초기 신앙인들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를 믿거나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이 예수를 재맥락화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할 것이다.”(418-149쪽)

바트 어만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교회의 일치를 향한 기나긴 여정이 아닌, 다양한 이들이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예수를 재맥락화하는 과정들의 연속인 것이다. 예수의 부활도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했듯 예수의 부활은 지금의 그리스도교를 있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그 때문인지 교회의 가장 큰 축제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부활은 역사적으로 인간 예수를 신으로 재맥락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일 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위해 빈 무덤을 필요로 했고, 무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당시 범죄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매장의 단계를 이야기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 스토리의 영속을 위해 그의 육체를 하늘로 올려 보내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게 갈릴래아의 가난한 청년 예수가 신이 되었다.

이러한 생각이 불경한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만의 말처럼 그리스도교는 끊임 없는 예수의 재맥락화를 통해 지금의 지위와 활력과 유지해 온 종교다. 구약의 하느님조차 자신을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신의 영속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끝임 없이 자신을 현재화하려는 신의 의지이기도 하다. 예수를 부활이라는 장치를 통해 하느님으로 재맥락화한 것은 4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의지였고,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하느님을 현재화했다. 그렇다면 우리시대의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다시 그리스도를 재맥락화해서는 안 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지금 우리는 모든 게 가능하고, 그 열린 가능성을 향해 무한도전을 강요받는 세상에 살고 있다. 실제 기술의 진보와 거대한 자본의 힘은 이미 모든 한계를 지워 버린 듯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은 왜소해질 대로 왜소해져 있다. 아이들 수백 명이 물속에 잠겨 천천히 죽어가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하고, 그들의 불가해한 죽음에 대한 애도와 고통의 연대는 조롱거리가 된다. 추운 겨울 거리에 나선 늙은 농부가 물대포에 쓰러져도 사과조차 받을 수 없다. 부모가 자식을 때려 숨져도 시신을 버린 뒤 천연덕스럽게 일상을 이어 가는 곳, 가난한 이들은 홀로 고독하게 죽어야 하는 곳. 그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가 물 위를 걷고, 말 한마디로 폭풍을 잠재우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웠다 한들, 그리고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배불리 먹였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그것은 단순한 이적을 넘어 사람들에 풍요와 건강, 권력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전달된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 그런 이적들에 감동받고 예수를 자신의 하느님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린 지금 절대적 빈곤과 예측 못하는 자연재해, 그리고 질병으로 고통 받는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그것들을 이미 극복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그런 것들은 공포가 아닌 관리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는 말이다. 내일 2000년 전 그러한 기적을 행하고 승천한 예수가 다시 구름을 타고 이 땅에 내려온다 해도 사람들을 크게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들은 중계차를 보내고, 광고를 계약하고 재림 예수라 쓰인 티셔츠를 만들어 팔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하느님으로 받아들인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풍경이고, 미래의 전망이다.

곧 부활절이 다가온다. 많은 교회가 부활의 현재적 의미를 묻고 새길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강력한 예수의 부활, 바트 어만식으로 표현하자면 재맥락화가 필요한 시대다. 4세기 니케아공의회가 만들어낸 신앙의 체계를 넘어서는 그리스도교의 거대한 전환이 요구되는 때인 것이다. 어만은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정말로 예수를 하느님으로 생각했는가?”라는 질문 대신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의 예수를 하느님이라고 생각했는가?”라고 고쳐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이 재맥락화다. 이 책이 시간을 거슬러 발굴해 낸, 혹은 재맥락화한 역사적 예수는 하느님이 아닌, 갈릴래아 출신의 젊고 급진적인 묵시론적 예언자다. 그는 자기 시대의 모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가장 뜨겁게 맞선 사람이었다. 주목할 것은 이 책이 밝혀 낸 역사적 예수는 모든 불의와 고통, 괴로움들이 먼 미래가 아닌 당대에 곧 신속하게 사라질 것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이 도저한 열정과 급진성, 낙관적 믿음이 나를 가장 전율케 하는 예수의 의미다.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느님인 예수보다, 나는 그런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더 감동스럽게 다가온다. 블로크의 말처럼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종교다. 그 의미를 깊이 새기며, 다시 한 번 예수의 재맥락화, 혹은 이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예수의 재장전을 기다린다.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고윤수(토마스)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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