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이영롱, "사표의 이유", 서해문집, 2015

흔히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물론 목구멍이 포도청이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목구멍 말고도 많은 신체 기관이 더 있다. 다른 신체 기관들은 잘 먹여만 놓으면 불만이 없는데 뇌는 종종 말썽(?)을 부린다. 무엇이냐면 먹고사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또 요구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정말이지 먹는 것만으로는 만족하며 살 수 없고, 먹고 나서도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싶게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먹는 것이 해결되었을 때는 물론이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는 불안한 상황을 감수하고라도 어떤 욕망을 만들어 내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충족시키게 한다. 그 욕망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사무실 같은 일터인가? 지하철 안인가? 아니면 학교나 집인가? 혹은 카페일 수도 있겠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현재 무엇을 하든 아마도 생계를 위한 일을 하거나 그 일을 하기 위한 예비적(사후적) 단계에 해당하는 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계를 위한 노동이 삶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노동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노동과 노동을 준비하기 위한 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내가 나로 살 빈틈이 거의 없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그런 하루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자기 삶을 살아 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 틈틈으로 분절된 시간 속에서 별로 성과도 못 얻고 자신이 게으른 탓이라는 자학적 결론으로 마무리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그리 만만하게 꺼지는 불이 아니다. 마치 종이컵 속의 촛불처럼 꺼질 듯 꺼질 듯 꺼지지 않고 계속 흔들리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용기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생계를 위한 노동을 잠시 포기하거나 다른 형태의 일터로 옮겨 간다. 즉, 사표를 내는 것이다.

▲ 이영롱, "사표의 이유", 서해문집, 2015
“사표의 이유”는 이렇게 사표를 낸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유를 분석한 책이다. 모두 11명의 ‘퇴사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면면을 보면 잘나가는 IT 컨설턴트, 투자회사 직원, 헤드헌터도 있고, 열정노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출판사 편집자들도 있다. 그리고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을 법한 시민단체 활동가도 나온다.

이들이 직장을 그만둔 이유는 임금이나 근로조건 같은 양적 내용이 아니다. “일과 삶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불안과 불만 때문이었다. 이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 직장 생활 다 그런 거지 무슨 삶과의 일치 따위 운운하며 사표를 내다니. 그러나 우리가 이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바로 우리 시대 임금노동의 풍경이 너무나도 살풍경해졌음을 이들이 알려 주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저자가 “노동 공간은 의미와 존중이 구현되는 현장이기보다 소진과 피로, 죽음과 모욕의 현장에 가깝다.”고 했을까.

일단 임금노동자들은 지나친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누릴 여유가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야근에 혹사당하고 주말에도 일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특히 출판사나 잡지사 편집자, 복합문화공간 기획자 같은 이들은 자신의 흥미와 일을 일치시키는 경우였기 때문에 좋아서 하는 일이니 더 마음껏(?) 하라는 식이었다. 시민 단체는 어떨까. 아마 신념과 일을 일치시킨 경우가 아닐까. 그래서 너의 신념대로 마음껏 일하라는 것이고.

그런데 일하는 과정이라도 좀 인간다우면 견딜 텐데, 이윤을 지상 목표로 두고 있는 회사라는 조직은 자기답게 되기는 고사하고 인간답게 되기를 일단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느 IT 기업 노동자의 사례를 보면 원래 협력적이고 벤처 회사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였다가 어느새 사람들이 서로 멀어지고 자기 책상 위의 일에만 집중하게 되더라는 얘기가 있다. 회사의 규모가 작을 때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있지만, 커지면 좀 사무적이고 딱딱해지기 마련이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회사가 이윤을 위해 일부러 개인들을 떼어 놓아 경쟁시키고, 그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이 재기할 수 있는 길은 다시 이윤을 내는 것 밖에 없는 무서운 일터로 만들어 버렸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생’ 같은 동료애 끈끈한 팀원은 판타지가 되고, ‘송곳’의 결기와 그로 인한 손배소는 잔혹극이 되어 버린다.

이만하면 사표의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럼 사표 뒤에 그들은 무엇을 하게 되었을까.

비영리단체에 간사로 일한다거나 협동조합 카페를 운영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학원에 가거나 귀농을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돈을 덜 벌면서 자기 시간을 더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다운 시프트’라고 하는데 자동차의 기어를 낮추어 더 천천히 간다는 뜻이다. 이들이 계속 행복할지는 알 수 없다. 책에도 나오듯 “자본주의의 바깥은 없”고 더 소외된 가장자리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표를 낸 사람들의 삶을 응원해야 한다. 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변화의 길을 앞서 더듬어 나가는 척후병들이다.

사실 조직에서 누군가가 낸 사표의 이유를 끝까지 캐묻는 사람들은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계속 다녀야 하는 멀쩡한 직장을 그 사람이 왜 그만뒀는지에 대한 안전한 답을 얻지 못하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불안한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그들은 왜 그만뒀을까? 책 속에서 나름대로 적당한 그들만의 이유를 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끝에서는 저자 이영롱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도 이제는 내가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지 좀 더 알게 되었고, 내 사표의 이유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이 책은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지만 어찌 됐든 예외적 사례를 분석한 책이다. 책을 덮고 나도 계속 회사를 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이들을 위해서는 책 말미의 “자기 보다는 ‘우리’를 계발하기”라는 말에 밑줄을 그어 놓자. 그 ‘우리’는 연대를 통해 구축된다. 그리고 자본이 노동자에게 하는 최악의 나쁜 짓은 연대를 위해 가장 기초가 되는 감정, 바로 옆 동료에 대한 관심과 우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쟁 구조다.

 
강변구
출판 노동자, 파주에 있는 출판사에서 십여 년째 어린이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올해 딸이 태어난 새내기 아빠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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