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적에 18화 (열일곱 살 때, 1956)


▲ 정호경 신부에게 단 하나 남은 가족 사진, 할머니

하루는 여동생이 고아원에 있던 나를 찾아왔어. 할머니가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거야. 밀주 단속에 걸렸기 때문이었지. 그때 할머니 연세가 일흔일곱이셨어.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결국 원장아버지에게 사정을 말씀드렸지. 원장아버지는 곧바로 경찰서에 다녀오셔서, ‘조사가 끝나면 곧 나오실 테니 걱정마라’ 고 하시더군. 할머니는 경찰서 유치장에 계시다가 3일 만에 나오셨는데, 몹시 지치셨어. 이제 더 이상 밀주를 담을 수 없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 할머니의 가장 큰 고민이었지. 나는 속으로 ‘나라도 돈벌이를 해야 할 텐데......’하며, 막연한 걱정만 했어.

병아리 키우기

나는 할머니에게 병아리 몇 마리를 사 달래서, 원장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고아원 마당에서 키우게 되었어. 그런데 나는, 병아리 모이를 구할 길이 없고, 병아리들은 먹을 게 없어 이리저리 헤매는 것을 보자, 곳간에서 몰래 보리 두 웅큼씩 두 차례나 퍼내어 병아리들에게 주었어. 다음날 또 배고파 허둥대는 병아리들을 보자, 또 다시 보리를 가지러 곳간에 들어가다가 원장아버지 부인에게 들키고 말았어. 난리가 났지. 어쨌든 내가 잘못했기에 용서를 빌고, 곧바로 그 병아리들을 할머니에게 갖다 드렸어. 처음부터 무리하게 시작했지!

중학교 3학년 2학기가 되자, 학교의 여러 선생님들은 나에게 말씀하셨어. ‘졸업 후에 사범학교를 가면 어떻겠느냐? 네 실력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당시에는 대다수의 아이들이 가난했고, 또 가난한 아이들이 공부도 잘했어. 고등학교 과정인 ‘사범학교’는, 나라에서 학비 전액을 지원하고, 졸업과 동시에 초등학교 교사로 취직이 되었으니, 나처럼 가난한 학생들은 서로 들어가려고 했지. 마찬가지 이유로, 가난한 학생이 대학에 들어가려면, 학비와 밥과 옷과 숙소 모두를 지원받고,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임관되는 ‘사관학교’가 최고 인기였어.

누가 너더러 여기서 공부하라고 했어?

나도 선생님들의 권유대로 사범학교를 갈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봤어. 10여명 남짓 남은 이 고아원은, 이제 해체단계를 밟는 듯 했고, 또 학비를 지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루는 원장아버지께서 나한테 물으셨어. ‘곧 중학교 졸업을 할 텐데, 어떻게 할 작정이냐?’ 나는 학교 선생님들이 권유하셨던 사범학교 말씀을 드리자, ‘넌 성적도 괜찮고 하니, 사범학교를 생각해보는 게 어떠냐?’하고 하셔서,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 그리고 원장아버지는, ‘공부하는데 불편한 게 없느냐?’고 물으셔서, 나는 공부할 방이 없다고 말씀드렸지. 그러자 원장아버지는, ‘사랑방이 비었을 때 거기서 공부해라’ 고 하셨지. 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원장아버지집 사랑방에서 작은 밥상 위에 책을 펴놓고 열심히 공부했지. 따뜻한 독방에서 공부한다는 게 얼마나 좋던지!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쾅 쾅 쾅, 사랑방 앞 툇마루 밟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사랑방 미닫이문을 스스르쾅 하고 열어젖히는 사람이 있었어. 원장아버지 부인이었지. 나는 엉겁결에 일어섰어. 몹시 화가 나신 얼굴로 나를 노려보시더니, "누가 너더러 여기서 공부하라고 했어? 건방진 놈! 여기서 이렇게 공부하면, 네 애비(원장아버지)가 학비를 대줄 것 같애? 어림없지, 꿈도 꾸지 마, 당장 이 방에서 나가!" 그리고 미닫이문을 쾅 닫고는 쾅 쾅 쾅 툇마루 소리를 내며 안방으로 들어가셨어. 잠시 온 몸이 떨리고 뼈가 녹아내리는 듯 했어. 서러움이었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어. 나는 책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그 방을 빠져나왔어.

내 생각으로도, 원장아버지가 내 학비를 주실 형편이 못 될 뿐만 아니라, 설령 형편이 된다 해도 부인이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어. 나는 원장아버지한테 학비 따위를 기대한 적이 없었다구.

사범학교 진학에 대한 꿈을 접고

아무튼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사범학교에 대한 미련을 정리했고, 내가 곧 나가서 함께 살게 될 할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더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가면서, 원장아버지 부인의 처신을 이해하기로 했지. 3년이 넘도록 같이 살면서 내가 느낀 원장 부인은, 전쟁고아사업(!)을 하시는 원장아버지를 처음부터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 했고, 우리 고아들 때문에 자신은 희생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한 적이 있기도 했으니까. 그분은 내가 미워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

중3 학생이 그런 일을 겪으면 울기 마련일 텐데, 할아버지께서는 울지 않으셨군요!!

나는 언제부터인가 어렵고 힘겨운 일을 겪을 때는 운 적이 없어. 그 대신, 성체 앞에서 기도할 때나,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심지어 그것이 삼류영화든 그렇고 그런 연속극을 볼 때도 눈물이 나더라고. 지금도 그래! 이상하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정호경/ 신부,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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