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적에 19화 (열여덟, 열아홉 살 때, 1957~1958)

소년 가장, 고1 때부터 담배 피우고..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봉화읍에 하나 밖에 없던 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지. 그리고 3년 반 동안 살았던 고아원을 나와, 할머니와 여동생이 사는, 방 한 칸 부엌 한 칸 초가집으로 왔어. 초가삼칸이 아니라 초가이칸이었지. 어쨌든 나는 그때부터 소년가장이 될 수밖에 없었어. 그때는 ‘소년가장’이란 말도 없었지만. 할머니가 밀주를 만들던 일도 그만 두셨으니까. 학교도 다니면서 할 수 있는 돈벌이는 없는 것일까......

그때는 일자리도 귀했지만, 이발소나 음식점에서 일하는 아이들도, 월급도 없이 그저 먹고 자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우는 게 고작이었지.

뭘 먹고 사나? 고민을 해 봐야 별 뾰족한 수도 없었어. 그 무렵 친구랑 어울려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지. 고1 땐데 말이야. 한번은 이틀을 굶은 채 담배를 피우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적도 있었어. 어떤 친구 하나가 나를 위로하며 내 곁에 있어주었지만, 가끔 담배나 생겼지 생계비는 생기지 않았어.

거지 나자로처럼 종기투성이 되어

고민은 커지고 학교공부는 뒷전이 되었으며, 건강도 나빠졌어. 몸에 종기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금세 온 몸에 펴졌어. 온 몸이 종기투성이였지. 할머니는, 영양부족인 나를 밤낮으로 걱정하시더니, 용케도 산토끼 한 마리를 구해 오셔서, 고아서 나에게 먹이셨어. 할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내 몸의 종기는 서서히 사라져갔어. 그때 나는 성경에 나오는(루카16,19~31) 거지 라자로가 생각났어. 부잣집 문 밖에서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던 라자로의 종기를 개들이 핥고 있었다는 얘기 말이야. 영양부족에 빠지면, 온 몸에 종기가 돋아난다는 것을 그때 체험한 셈이지.

원장아버지는 나의 처지를 가엾게 생각하셔서, 모 신문지국을 맡아 해보라고 하셨어. 신문을 배달하고 구독자 수를 늘리며, 수금을 해서 본사에 송금하고, 약간의 돈을 남기는 일이었지. 그런데 구독자 수가 50여 명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내 수입이 너무 적었고, 구독자 수를 늘리는 것은 너무 어려웠어. 지금도 그렇지만, 시골에서 신문을 보는 사람은 관공서를 빼면 너무 적었고, 또 수금을 해서 제때에 본사로 송금해야 하는데, 우리집 양식이 떨어지면 우선 그 돈을 양식 사는데 써버리기까지 했으니 될 리가 없었지. 결국 일 년 만에 빚을 좀 얹은 채 원장아버지에게 돌려드렸어. 무척 죄송했지. 그리하여 고등학생 지국장대리시대은 실패로 끝났어.

봉화공소가 본당이 되면서..

천주교 안동본당 봉화‘공소’가 드디어 봉화‘본당’으로 승격했어. 1958년이었지. 첫 본당신부님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M.E.P.) 소속 이성춘(J.M.MAURICE)신부님이셨어. 20대 후반이신데도, 조용하고 점잖으셔서 조선의 선비 인상이었지. 우리 신자들은 머지않아 이신부님에게 ‘공자님’이라는 별명을 지어드렸지. 고아원 강당 겸 공소강당을 임시성당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사제관으로는 내가 쫓겨났던 그 사랑방을 사용하게 되었어. 원장아버지가 배려한 거지. 신부님 식사까지도. 

▲ 현재 봉화에 있는 정호경 신부의 서재

나는 비록 배가 고파도, 물 만난 고기가 되어, 임시성당과 신부님을 자주 찾아갔어. 그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이어서, 미사는 라틴어로 했고, 평일미사는 항상 새벽 5시나 6시에 있었지. 이신부님은 나를 좋은 협력자로 보셨는지, 부임 다음날 새벽 5시 미사준비를 도와달라고 하셨어. 그날 밤 나는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캄캄한 밤에 성당엘 갔는데, 성당문은 닫혀있고 아무도 없었어. 밖에서 한 시간쯤 기다리니까, 그제서야 신부님이 나오셨지. 그때는 우리집에 시계가 없어서 내가 한 시간이나 일찍 성당에 간 거야. 그날 나는 신부님을 도와 제의준비도 제대준비도 배우며, 미사에 참례했어. 조용한 부임미사였지.

그때부터 나는, 매일미사는 물론, 매주 금요일 오후 학교를 마치면, 어김없이 그 사랑방에서 신부님을 만났어. 다음 주일 강론준비를 돕기 위해서였지. 신부님은 먼저 프랑스어로 강론을 준비한 후, 어설프게나마 우리말로 번역하셨는데, 그것을 갖고 신부님과 내가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우리말답게 고치는 일이었어. 나는 신부님의 강론준비 협력자이자 우리말 선생(!)이었던 셈이지.

이때부터 나는 성경과 교회서적을 열심히 읽었고, 성당에서 기도도 열심히 했어. 성당의 성체 앞에 홀로 앉으면, 무슨 구체적인 이유도 없는데 눈물이 쏟아지더라구. 앞섶을 적실 정도로 자꾸만 자꾸만 흐르다가 그치면, 마음도 정신도 몸도 맑아지고 가벼워져서, 그때부터는 내가 주님께 하고 싶은 얘기를 맘껏 쏟아놓았지. 내가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이때부터였어. 

친구, 류강하 신부를 만났다

그 무렵에 내 친구 류강하 신부를 만났어. 봉화성당에서였지. 류신부 아버님은 내가 다니던 농고 교장이셨어. 류신부는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ㅅ대학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재수생이었지. 입시에 떨어진 후, 아버님이 계신 봉화에 왔다가, 어찌어찌해서 성당에 나와 구도를 시작했어. 류신부는 뭘 했다 하면 일편단심으로 하는 성격이었지. 지금도 여전하지. 나이는 나보다 한 살이 많고, 학교로는 두 해 선배였어.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을 영주와 봉화에서 두 번 다녔으니까. 그러나 신부는 내가 한 해 먼저 되었지. 그는 신학대학 본과 2학년 때부터 대머리였지만, 내가 봉화에서 만났던 그때는 진짜 미남이었어.

봉화성당은 곁방살이 일 년이 채 못 되어, 지금의 성당 자리로 옮겼어. 논을 메워 임시성당을 짓고, 가정집 한 채를 사들여 사제관으로 사용했지. 신부님 식사준비를 책임지는 식복사는 고아원 출신 ㄱ군이었는데, 그는 머지않아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어.

이 무렵부터 미국 국민들이 보낸 구호물자가 한국천주교회를 통해 배급되기 시작했지. 주로 옥수수가루나 밀가루였고, 가끔 분유나 식용유, 그리고 헌옷들이었어. 신자든 비신자든, 가족 수대로 나눠줬는데, 우리집도 세 식구 몫을 받을 기회가 가끔 있어서 허기를 면하곤 했지. 분유는 끓여 먹기도 했지만, 쪄서 식히면 마치 딱딱한 과자같아서, 아이들이 가지고 다니며 먹기도 했는데, 한꺼번에 많이 먹어서 설사를 하기도 했다구.

헌옷은 대체로, 체구가 큰 미국사람들이 입던 옷이라서 우리 몸에는 맞지 않았지만, 찬 밥 더운 밥 가릴 형편이 아니었고, 더더구나 패션을 따질 형편이 되겠어? 크든 작든 그대로 입거나 줄여서 입기도 했지. 그 무렵 안동성당에서는 우스운 일도 벌어졌지. 브래지어(여자가슴싸개)를 배급받은 어느 아저씨는, 밤새 연구 끝에 그 이튿날 새벽미사에 방한용 귀덮개를 하고 나타난 거야. 그 시절 우리나라 대다수 여자들은 브래지어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미사를 집전하시던 프랑스인 신부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에, 미사 중에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으셨다는 거야.

앞으로 신부가 되겠다...

학교는 출석만 겨우 하는 정도였어. 나는 교과서도 없었지. 하지만 중학생 때부터 수학성적은 뛰어나서 그랬는지, 시험 열흘 전쯤 친구한테 수학 교과서를 빌려서, 이틀 밤을 새워가며 문제들을 푼 후에 교과서를 주인에게 돌려줬어. 그것도 시험 때마다 그랬지. 딱 한 권 내 교과서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주셨던 화학교과서였어. 그래서 화학공부는 열심히 했던 것 같아. 담임선생님께 보답하기 위해서였겠지. 고2 때 전교생이 같은 수학문제를 갖고 시험을 치룬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내가 일등을 했지. 하기야 전교생이라 해도 200명이 채 못 되었어. 아무튼 나는 성당에만 열심이었고 학교는 뒷전이었지. 절박한 소년가장의 처지와 앞으로 신부님이 되겠다는 소망, 그때는 그게 전부처럼 느꼈으니까.

고2 때 농업담당 선생님이 나한테 걸그림(괘도)을 그려달라고 하셨어. 선생님은 내 주문대로, 모조전지 20장, 검은 잉크와 여러 종류의 철필촉을 사주셨지. 일주일동안 밤잠을 설치며, 단칸방 호롱불 밑에서 일을 마쳤어. 할머니와 여동생의 수면을 방해하면서. 나는 아르바이트로 생각하고 적은 수고비라도 기대했는데, ‘수고했네’ 라는 한마디뿐이었어. 좀 섭섭했지. 하지만, 당시 학교에서는 재료조차 사줄 예산이 없었을 터이고, 그 재료도 농업담당 선생님 개인 부담이었을 게 거의 확실했을 터이니, 소년가장인 내가 뭘 기대했던 게 무리였을 거야. 그때 학교 형편이 그랬으니까.

2학년 말에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는데, 몇몇 친구들의 권유로 나도 출마했다가 보기좋게 떨어졌어. 허영이었지! 당선된 친구가 그랬어. ‘자네가 선거운동도 뭣도 하지 않는 사이에, 나는 달밤을 틈타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니며 선거운동을 했지. 그러니 자네가 낙선한 것은 뻔하다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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