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적 관여정책으로 공간 확보

 (편집자 주- 프란치스코 교황은 9월 19-22일에 쿠바를 방문하고 있다. 그는 이어 23일부터 곧바로 미국을 방문한다. 시사지인 <애틀랜틱>(대서양)의 제이슨 베리는 9월 18일 교황의 쿠바 방문을 앞두고 쿠바 사회주의 아래에서 쿠바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는 글을 실었다. 쿠바 교회의 경험은 교황청의 대 중국, 베트남 정책에도 영향을 주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대 북한 정책에도 참고가 될 수 있다. 쿠바의 전체 인구는 1100만 명이며, 면적은 남한 땅보다 조금 넓다.)

50여 년 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키면서(1959) 쿠바에 있는 가톨릭교회의 재산도 몽땅 몰수됐다.(쿠바 혁명은 원래 급진 민족주의 혁명으로서 공산주의 혁명은 아니었으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고 미국의 제재를 받으면서 쿠바는 급격히 소련에 기울어졌다.)

▲ 쿠바의 오래된 성당.(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토마스 데 빌라누에바 성인의 이름을 딴 한 대학을 몰수하면서 누군가 이 성인의 조각상 머리를 잘라 버렸다. 나중에 쿠바 정부가 이 대학을 직업학교로 바꾸면서, 이 목 없는 조각상은 영향력을 잃어버린 가톨릭교회의 기괴한 심벌이 되었다. 퇴락해 가는 경당의 벽들은 그라피티 그림들로 상처를 입었다.

미국 마이애미 대교구의 토머스 웬스키 대주교는 (미국교회의) 쿠바 교회에 대한 원조사업을 총괄해 왔다. 그는 “빌라누에바 조각상은 1963년부터 머리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쿠바 가톨릭교회의 몸체는 공산주의 아래에서 무관심과 공개적 적대를 받았음에도 고난을 이겨내고 최근에는 더욱 커졌다.

지난해, 정부는 빌라누에바 조각상과 경당을 다른 재산들과 함께 교회에 조용히 반환했다. 작년 가을, 교회는 쿠바혁명 뒤로 처음으로 새 신학교를 짓는 기공식을 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번 9월 19일 아바나 공항에 내렸을 때,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 대통령(피델의 동생)이 그를 맞았다. 교황은 이 조각상이 훼손되기 전부터 미국이 쿠바에 가해 온 무역제재를 중단시키기 위한 쿠바의 노력에 가장 큰 연합세력일 것이다.

쿠바에서 교회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세속적 이념 둘 다와 공명하면서 다른 조직이 갖지 못한 독특한 공간을 쿠바 사회 안에서 구축해 왔다. 푸에르토리코 대학의 전직 쿠바역사 교수인 하비에르 피게로아는 “정부를 빼면, 교회는 쿠바에서 가장 중요한 조직”이라고 말한다.

쿠바 전역에서 주교와 사제, 수녀, 그리고 평신도 일꾼들은 쿠바의 사회안전망을 사실상 책임지고 있다. 쿠바 정부의 혁명은 금욕주의 원칙들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현금이 부족한 정부는 모든 장애인, 노인, 그리고 빈민을 돌볼 능력이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규제 없는 자본주의가 “무관심의 세계화”를 촉진하고 있다고 비판해 왔는데, 쿠바가 미국과 외교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톨릭교회의 사회복지/사회개발 조직인 카리타스와 외국의 가톨릭 교구들은 쿠바의 빈곤에 맞선 투쟁에 함께 하고 있다. 교황청이 유지해 온 쿠바 공산주의와의 관여(engagement)정책(관계유지 정책, 개입정책, 포용정책)은 반세기도 더 넘은 뒤에 이제 열매를 맺고 있으며, 쿠바의 국가-교회 역학구조는 이 나라에서 새로 등장하는 경제의 형태를 결정지을 것 같다.

피델 카스트로가 교회 박해를 시작하기 전에,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의 잔인성과 탐욕을 보면서 쿠바의 좌익 가톨릭신자들 중에는 혁명 지지가 늘었다. 피델은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종종 종교적 용어로 자기 뜻을 표현하고는 했다. 그는 혁명 이듬해인 1960년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율법학자, 부자, 선동꾼, 착취자였다.... 그가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스페인 출신으로 프란치스코회 사제인 하비에르 아르수아가는 일찍부터 혁명을 옹호했다. 그가 맡은 아바나의 본당에는 바티스타의 협력자들을 수감한 한 군 교도소가 속해 있었다. 피델과 더불어 쿠바혁명을 이끌었던 체 게바라는 아르수아가 신부에게 “언제든 그 죄수들을 만날 수 있다”고 허락해 줬다. 아르수아가 신부는 2008년의 한 인터뷰에서, 당시 인민재판에서 마치 자동차 조립 공정처럼 간단히 죄수들에게 사형판결을 내리고 줄지어 사형대로 보내던 것을 회상했다. 그는 이런 사형수들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듣는 고해사제가 되어 줬고 누구든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 영성체를 해 줬다.

“그 죄수들이 살인자인지 아닌지는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결정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들에게 ‘이봐요, 당신은 내세를 믿나요?’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사형수들이 죽음에 직면하여 ”평정심, 평온감”을 갖기를 바랐다. 그는 55명이 사형집행대로 갈 때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 아무도 기둥에 묶여야 하지 않았다. 그들 아무도 눈을 가려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서 죽었다. 물론, 나는 십자가를 들고서 한 사람씩 옆에 서 있었다. 아르수아가 신부는 이 처형을 지켜보며 받은 정신적 외상 때문에 사제직을 그만두고 (미국 보호령인) 푸에르토리코로 갔다.

그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1961년 봄, 미국 CIA의 무장훈련을 받은 쿠바계 미국인들이 혁명정부를 뒤집으려고 피그 만에 상륙했으나 1000여 명이 포로가 되고 실패했다. 사제 4명이 이 작전에 참가했고, 이 때문에 이미 진행되고 있던 카스트로의 교회 탄압 계획이 더 강화되었다. 그는 가톨릭 학교들의 폐쇄를 명령했고, 그해 가을에 사제 130명이 스페인으로 송환됐다. 그 뒤 여러 해 동안 3500명의 수녀와 사제가 쿠바 섬에서 나갔다. 정부 측 깡패들이 교회에 침입하고, 종교행렬을 방해하고, 사제와 평신도 활동가들은 투옥되었다.

존 커크는 “하느님과 당 사이에서”라는 책에서, “교회는 황폐해졌다. 교회 소득의 원천인 학교들이 잘려 나갔다. 사제 수는 겨우 3년 만에 800명에서 200명으로 줄었고, 신자 대부분은 떠났다. 그리고 교회와 정부 지도자들의 관계는 거의 적대 상태였다.”

하지만 교황청은 신을 믿지 않는 공산주의가 교회에 가장 큰 위협이라고 보면서도 쿠바와 외교관계를 끊지 않았다. 교황대사인 체사레 차키 몬시뇰은 피델과 식사를 같이하거나 스쿠버 다이빙을 같이 하면서 환심을 샀는데, 이를 보고 일부 쿠바 주교들은 풀이 죽었고 마이애미에서 점점 규모가 커지던 망명 쿠바인 사회는 화를 냈다. 당시 차키 몬시뇰은 “인민들은 물질적 복지에 근본적 변화를 얻어냈다”고 선언했다. “부의 재분배가 이뤄졌다.... 전에는 별로 보이지 않던 사회정의라는 것....”

미국 노트르담 대학의 신학교수인 로버트 펠튼 신부는 “차키는 자신의 시대를 앞서갔다”고 지적했다. “아무도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의 접근법이 옳았다. - 체제와 당신이 멀어지지 않도록 하고, 일에 끼어들되 당신의 양심에 따라라. 가톨릭교회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체제와 더불어 공존해야만 했다.”

뼈만 남은 쿠바 교회가 1970년대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때, 남미 주교들은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주창했다. 해방신학으로 알려진 새로운 움직임은 도시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가난한 이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비전, 꽤 괜찮은 수준의 생활과 정의를 추구하는 선교의 모습을 보여 줬다.

한편, 피델은 1985년에 브라질의 한 좌파 사제와 인터뷰를 했고 이 인터뷰는 “피델롸 종교”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부유한 계급이 교회를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남미 교회가 좌선회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함부로 깔보기 힘든 몇 가지를 강조했다: 쿠바는 남미에서 문해율이 가장 높다; 많은 이가 교육을 받는다; 무상의료 제도를 갖추고 있다; 흑인이 일터와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고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혁명 전보다) 더 많은 기회가 있다.

그해, 쿠바 가톨릭교회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쿠바교회 전국대회”(ENEC)에서는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유산에 도전하지 않으면서도 교회가 공공 영역에 복귀하려는 전략을 추진했다. 역사학자인 하비에르 피게로아는 “이 모임이 열리기 전까지는, 교회는 약했고, 미사를 드리는 것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밖으로 나가 복음화를 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교회를 다닌다면, 그의 자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할 수도 있었고 특정 직업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는 ‘문화에 적응하고, 사회 안에서 활동하라’고 했다.” 이 대회 뒤로 “공간 얻기”라는 말은 교회 출판물이나 강연, 모임에서 더 큰 정의를 추구할 때 쓰는, 비록 조심스런 표현이기는 하지만, 자유 확대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교회는 혁명과의 더 대담한 공존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쿠바의 대외무역에서 80퍼센트를 차지하던 소련이 무너지면서(1991) 지진 같은 전환이 찾아왔다. (쿠바가 설탕을 보내주는 대신 소련에서 받던 밀 수입이 끊기면서) 1990년대에는 식량이 극심하게 부족했다. 하버드 대학의 법학자인 질 골든지얼은 “쿠바 정부는 큰 정치적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종교를 풀어 줄 수 있다고 계산한 것 같았다. 경제 성장을 위한 하나의 실용적 수단으로”라고 쓴 바 있다. 1992년에 개정된 헌법에서 쿠바는 “무신론” 국가에서 “세속주의” 국가로 바뀌었다. (편집자 주-세속주의(secularism)는 국교를 두거나 종교에 특권을 주지 않는 정교분리주의를 말한다. 미국, 한국, 인도, 프랑스 등 대부분 국가가 세속주의 국가다.)

1993년에서 1997년 사이에, 카리타스와 미국의 가톨릭구제회는 10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투입해 쿠바교회의 본당들의 배급소에 의약품과 생리대, 위생용품, 그리고 식량을 보냈다. 학자인 에이드리언 헌에 따르면, 1998년에 쿠바교회는 탁아소 20곳, 양로원 21곳, 병원 5개를 운영하고 있었다.

웬스키 주교는 아직 평사제였을 때인 1996년에 쿠바를 처음 방문했다. 쿠바 카리타스에 청소년 당뇨병 환자를 위한 인슐린 약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것이 시민사회가 만들어진 시작이었다. 정부는 당 밖에 있지만 반체제인사들이 아닌 이들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깨달았다. 카리타스 사람들은 공간을 얻으려 애쓰고 있었다”고 말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8년에 쿠바를 방문하는 것을 그가 환영하고 있을 즈음에는, 피델은 자신의 혁명 공약을 이루기 위해 상당히 의존하는 외부 원조자금을 얻기 위해 교회와 자기 나름의 건설적인 관여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피델 측에서 보기에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쿠바를 방문하면서 (미국의) 무역금지 조치는 “억압적이고.... 불의하며,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밝힌 것이 중요했다. 교황은 또한 피델을 향해서도 요구가 있었다. “(쿠바가) 현대 국가라면 무신론이나 종교를 자기의 정치적 법령 가운데 하나로 삼아서는 안 된다.”

라울 카스트로는 2006년에 형인 피델이 건강 문제로 은퇴하고 자신에게 권력을 넘겨준 뒤, 그리고 쿠바의 최대 우방 가운데 하나였던 베네수엘라의 위고 차베스 대통령이 죽은 뒤, 쿠바의 하향식 계획경제체제에 여러 개혁조치를 꾀하고 교회에 중대한 양보조치들을 취했다. 국가수반으로서, 그는 50만 개가 넘는 공무원 일자리를 줄이고, 일부 소기업을 허용했으며, 사영 대부업과 부동산업을 허용하여 빈사 상태의 경제를 회복시키려 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12년에 쿠바를 방문했을 때, 쿠바는 성금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리고 라울은 올 5월에 로마를 방문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 그가 미국과 쿠바가 국교 재개를 선언하는 데 도움을 줘서 고맙다고 밝혔다.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계속 이런 식으로 한다면, 저는 다시 기도를 시작하고 교회로 돌아가겠습니다.” “내 말은 (비유가 아니고) 말 그대로입니다.”

올해 84살인 라울이 노년에 신앙으로 되돌아오는지 아닌지 간에, 쿠바교회는 남미에서 가장 오래 유지되는 마르크스주의 정부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해 쓴 약을 삼켜 왔다. 현재 쿠바에는 사제가 300명이다. 혁명이 일어나던 1959년에는 인구는 현재의 거의 절반이었지만 사제는 800명이었다. 쿠바의 가톨릭 신자수는 혁명 직전에는 전체 인구의 3/4로 추정되었는데, 지금은 50-70퍼센트로 보인다. (미사참석률은 훨씬 더 적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쿠바 방문과 미국 방문 중에 무역금지 조치의 해제를 촉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방문 너머로 보이는 큰 문제에는 금지조치가 해제된 뒤 무역이 재개되면 통제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게 될지, 그리고 교회는 어떻게 이 새 환경 속에서 움직이게 될지 하는 것들이 포함된다. 쿠바의 식량부족은 1990년대 초처럼 심각하지는 않지만, 배고픔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일부 가톨릭 출판물에서 쓰이고 있다.

예수회의 한 2014년 보고서는 “우리나라는 정보에 대한 접근이 크게 제한되고 있으며, 자유로운 표현과 개인행동의 자유도 마찬가지”라고 서술했다. “여러 가지를 바탕으로 가치 절하가 계속되고 있다: 세속주의와 무신론 교육, 사회제도들 대다수의 반 그리스도적 성격, 커다란 경제적 곤란들, 합리적 소망을 지닌 다수의 좌절, 세계 소비주의에 참여할 아무런 힘이 없다는 데에 대한 좌절감 등이다.”

웬스키 대주교는 “쿠바 경제는 망가졌고 (관리들은) 경제가 움직이게 할 방법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민주적 모델을 보고 있지 않고, 그렇다고 딱히 중국이나 베트남식 모델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대안을 찾고 있다.... 라울과 그 밑의 사람들은 이것이 안으로 폭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죽을 때 평화롭게 죽고 싶어 한다.”

기사 원문: http://www.theatlantic.com/international/archive/2015/09/catholic-church-cuba-pope-francis/406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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