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를 더 얘기해 보련다"

브라질의 프레이 베토 수사가 1980년에 피델 카스트로를 니카라과의 마나과에서 만났을 때, 둘은 쿠바의 종교 자유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중에 책으로 나온 이 대화는 쿠바의 교회와 국가 간의 화해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고, 결국 요한 바오로 2세의 쿠바 방문으로 이어졌다.

이 책에서는 카스트로가 1940년대 어린 시절에 가졌던 가톨릭 신앙과 관련해 그의 복잡한 종교관을 드러내 보였다. 그는 어릴 적에 쿠바 남부의 산티아고에서 한 엘리트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스페인 예수회 사제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베토 수사는 도미니코회 소속으로서, 쿠바 혁명에 공감하는 해방신학자였다. 그는 카스트로에게 공산국가인 쿠바에게는 실제적으로 세 가지 선택이 있다고 말했다. 가톨릭교회에 적대적이 되는 경우, 즉 미국이 쿠바에 대해 경제 제재를 한 것과 똑같이 하면 된다. 다음으로는 교회에 무관심한 채로 지내는 길이 있고, 아니면 종교들과 더불어 대화하는 길이 있다.

카스트로는 세 번째 길이 옳은 길이라고 받아들였고, 자기는 지난 16년간 가톨릭 주교는 한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쿠바의 혁명정부는 교황청과 외교관계를 단절한 적이 없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을 신조로 하는 국가였다.

1980년대 중반에 카스트로는 쿠바에서 가톨릭교회의 존재를 인정하는 쪽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주교들을 만나고, 종교 자유라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예배의 자유는 허용했다.

베토는 이 1980년의 대화를 1985년에 “피델과 종교”라는 책으로 냈고, 이 책은 쿠바에서만 130만 부가 팔리면서 신앙에 대해 새로이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에서 카스트로는 어렸을 적에 아주 깊이 신앙에 빠져 있었다. 어머니는 날마다 기도를 드리고 성인상들 앞에 촛불을 켜는 열심한 신자였고, 삼촌이나 아주머니들도 다 그랬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그를 산티아고에서 드라살레 수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보냈고, 이어 학생이 1000명인 명문 콜레지오 데돌로레스 대학에 보냈다. 이 대학에서 그는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기숙사 환경은 그에게는 또 다른 가족과 같았다. 카스트로는 베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예수회 신부들)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인성과 언행에 큰 관심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아주 엄격했다.”

그는 그 예수회원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그 예수회 사제들은 카스트로에게 끈기와 규율, 그리고 책임성 등을 가르쳤고, 이는 나중에 그가 혁명을 준비하는 게릴라 기지로 삼았던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에서 지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그는 마침내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베토의 책에 따르면, 카스트로가 교회와 갈라선 것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1940-50년대의 가톨릭교회가 기존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반혁명 집단이라고 보았다. 당시의 만연한 불평등과 불의를 못 본 체하고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그가 1950년대에 이끌던 게릴라들 대부분은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게릴라 부대에는 그가 속한 교구의 주교가 임명한 군종신부(또는 지도신부)까지 있어서, 산에서 태어난 아기들에게 세례를 주고 혁명가들이 죽으면 묻어 줬다. (요한 23세 교황은 이 신부가 군복 색 성직자복을 입을 수 있도록 허가해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혁명이 성공하고(1959) 무신론과 공산주의 쪽으로 흐르자, 그 신부는 그 흐름에 반대했고, 피델의 이원적 정치관에서는 그러한 교회는 혁명의 적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훗날 주장했듯, 쿠바 혁명은 (말하자면 멕시코혁명과 달리) 반 종교적인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국가가 죽인 사제는 한 명도 없었지만, 그의 종교 탄압은 잔혹했다.

1961년에 카스트로는 자기가 다녔던 모교를 폐교시켰고, 예수회는 추방되었다. 성직자 수는 전국에 200명밖에 안 될 정도로 줄었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은 정부전복 행위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베토의 인터뷰는 카스트로가 가톨릭에서 떠난 본질적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맴돈다. 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나 남미 주교단의 메데인 총회(1968) 뒤에 가톨릭학교에 다녔더라도 반성직주의적인 혁명가가 되었을 것인가를 간접적으로 묻는다.

카스트로는 이 질문에 한번도 제대로 답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베토는 피델이 기본적으로 1950년대식 교회관을 가지고 있고, 1960년대 이후 (교회의) 변화상에 그가 얼마나 매혹되어 있는지를 보여 준다. 특히나 해방신학의 일부 분파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과 복음을 결합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그러했다.

이 책이 출판되면서 가톨릭 신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있었던 깊은 적대감이 일부 극복되기도 했다. 그리고 쿠바인들은 신앙과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무너진 뒤(1991) 개정된 쿠바의 1992년 헌법에서는 쿠바는 더 이상 공식적으로 무신론 국가가 아니라고 선언되고, 예배의 자유가 회복되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예전에 소련이 주던 50억 달러의 원조가 끊긴 뒤 겪은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 쿠바인들은 이 시기를 농담을 섞어 “특별 시기”라고 부른다- 교회는 다시금 중요한 존재가 되었고, 성직자 수도 2배로 허용 받았다.

카스트로는 여전히 다른 사회집단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강하게 속박했지만, -쿠바에 있는 신학교들과 수도원들에도 마찬가지로 정부 끄나풀들이 있었다.- 갈수록 교회를 적이라기보다는 파트너로서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가톨릭이 (혁명의) 경쟁자이며 정치적 야심을 지닌 사회적 보수 집단이므로 계속 감시해야 한다는 의구심을 완전히 떨친 적이 없었다.

▲ 2015년 9월 20일 일요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 (이미지 출처 = CRUX)

1998년에 요한 바오로 2세가 쿠바를 방문하면서 중요한 돌파구가 열렸다. 그는 쿠바는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세계는 쿠바를 받아들이라고 촉구했다. 쿠바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요구하면서 미국이 가한 경제제재를 강하게 비판했다.

조지 비글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전기인 “희망의 증거”에서, 이 방문 내내 카스트로는 반미 선전을 계속하면서도 교황에 대해서는 놀랄 정도로 경의를 보냈다“고 회고한다. 일부 관찰자들이 보기에는 ”어떻게든 고해소에 가기를 원하는, 자기의 자존심이 고해를 허락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오직 한 사람(교황)에게 고해하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방문에 즈음해서 정치범 100명이 석방되고 성탄절이 공휴일로 복귀하는 중요한 제스처도 있었다. 하지만 교회와 국가 관계에는 별 의미 있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쿠바는 2002년에야 쿠바 주교 13명을 대화에 초청했다.

그 뒤, 교회와 국가 사이의 대화는 아주 부드러워졌고, 라울 카스트로가 정권을 넘겨받은 2008년부터는 대화가 더욱 강화되었다. 교회는 서서히 쿠바에서 제일 큰 시민사회가 되었고, 강한 통제 속에서도 상당한 자치를 누렸다.

이 모든 과정 중에, 신앙에 관한 피델의 개인적 속마음은 여전히 일종 미스터리였다. 그럼에도 그의 어린 시절 신앙을 회복했다는 징표들이 보인다는 소문들이 나돌았다.

베네딕토 16세가 방문하기 전날(2012), 피델이 교회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교황청의 한 고위 인사에 따르면 그가 거의 죽기 직전이며 “이 마지막 순간에 종교와 하느님에 더욱 가까이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보도에 따르면 그의 딸인 알리나는 이렇게도 말했다. “아버지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임하여 예수님을 다시 발견했다. 아버지는 예수회에 교육을 받았으니 내게는 그게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당시 피델은 베네딕토 16세를 만났지만, 면담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5년에 쿠바를 방문했을 때는 40분간 비공식 면담을 했지만 그가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나중에 카스트로의 아들인 알렉스가 공개한 사진들을 보면 둘은 서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이 카스트로에게 준 선물들을 보면 카스트로가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도록 도우려는 의도임이 뚜렷하다. 카스트로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자신이 베토와 인터뷰했던 책 “피델과 종교”를 한 권 줬고, 교황은 그에게 책 몇 권을 줬는데, 여기에는 아만도 욜렌테 신부(예수회)의 강론집 하나와 그 CD가 포함돼 있었다. 그 신부는 1940년대에 카스트로가 어릴 적 가르쳤고, 카스트로가 졸업한 뒤에도 연락을 유지했었다. 하지만 1961년에 예수회가 추방될 때 그도 함께 추방되었다. 그는 나중에 카스트로가 자기가 양아버지와 같았다고 말했다는 일을 공개하기도 했다.

자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외로운 아이, 나중에 혁명에 나서면서 어머니의 신심을 버렸던 청년이라는 피델의 부드럽고 약한 측면이 공개된 적은 별로 없다. 그런데 아마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 점을 건드린 것 같다.

카리스마적인 천재성과 무자비함, 특히 자신의 적으로 보이는 이들에 대한 탄압으로 두드러지는 자신의 삶과 정치 인생을 되돌아보는 한 사람에게, 교황의 그러한 선물들은 좋은 교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로 피델의 영혼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는 거의 신비에 싸여 있다. 하지만 그가 최근에 쿠바의 공식 공산당 일간지인 <그란마>에 쓴 한 산만하지만 관심이 쏠리는 글에 그 한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인류의 불확실한 운명”이라는 제목의 이 글(10월 9일)은 “정치적 원칙들보다는 종교적 원칙들에 좋은 것들이 더 많고”,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들 상당수가 종교인들의 손에 태어났다”고 강조했다. 그는 위대한 과학의 성취들도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이론들을 배제하지 않았다면서, 종교들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정하고 있다.

이를 보면 그가 죽기 전 마지막 나날에, 종교가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예수회 학교와 드라살레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으며,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 노아와 방주 이야기가 생각난다면서 글을 맺는다. “가뭄과 여러 원인으로 식량이 부족했을 때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진 이야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 준 것은 자유시장경제도 아니고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도 아니며, 자비로우신 창조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사례를 성경에서 끄집어내는 것은 흥미로운 이야기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문제 하나만 가지고 더 많은 생각을 나눌 또 다른 기회를 가져 볼 생각이다.”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죽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순간에 신앙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는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기사 원문: https://cruxnow.com/global-church/2016/11/26/fidels-faith-remained-mystery-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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