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역행하는 반공주의 몸짓 멈추었으면

지난 5월 23일,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25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복식을 거행한 로메로 대주교는 민중의 성자였다. 독재정권에 맞서 민중의 인권과 정의를 대변하다 1980년 미사 봉헌 중 암살당한 로메로 대주교는 교회가 복자로 선포하기 훨씬 이전부터 가난한 이들의 수호자이자 정의의 순교 성인으로 남미 전역에서 민중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었다.

▲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성인 공경은 그렇게 민중적이다. 신자들의 현양이 먼저 있었고, 그를 추인하듯 교회의 시복, 시성 절차가 뒤따랐다. 교회 역사도 그러했다. 민중의 목소리를 하느님의 목소리로 여긴(Vox Populi, Vox Dei) 초대 교회는 순교자를 비롯하여 거룩한 이들에 대한 자연발생적인 민중의 존경과 추모를 모두 받아들였다. 하지만 중세에 이르러 성인 공경 움직임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그것을 교회의 권위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공적 절차를 마련해 그 과정을 거친 첫 시성식을 993년에 거행했고, 교황청 전담 기구인 시성성까지 1634년에 설립한다.

그처럼 성인은 상향식으로 탄생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콜카타의 복녀 데레사는 생전에 이미 자선의 성녀 마더 데레사로 존경받았다. 아우슈비츠에서 순교한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와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에디트 슈타인 수녀)도 시성되기 전에 유럽 전 지역에서 현양 받고 있었다. 성인은 시성되기 전에 이미 성인이었던 것이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에 이어 다시 시복, 분명 축복이지만

지난 8월 19일, 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 주교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 예비 심사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특별 담화를 발표하고 시복 대상자들에 대한 ‘예비 심사’를 진행할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시복 추진 대상자 81명의 사진과 명단을 공개하고, 순교자들의 삶이나 순교 사실들과 관련된 정보들을 제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번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의 특징은 1901년 제주 신축교난 때 순교한 신재순(아우구스티노)과 1976년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병사한 김선영(요셉) 신부를 제외하면, 지난 2007년부터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서 시복 절차를 준비해 온 ‘신상원(보니파시오)과 김치호(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8위와 함께 모두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과정에서 공산당 박해로 피살 및 실종된 인물이라는 점이다.

1784년 창립해 231년 된 한국 가톨릭교회가 이미 공경하고 있는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에 이어 다시 시복 절차가 진행되는 것은 분명 축복받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순례의 여정 속에 있는 지상교회는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해야 하기에 지상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천상교회 성인들과의 통공을 필요로 한다. 천상교회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도록 지상교회 우리들을 초대하고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도록 들어 올려 준다. 성인들을 공경하는 이유다.

공산당 박해로 인한 순교자 시복, 지금이 적절한 때인가?

하지만 목함지뢰 폭발사고로 곧장 군사적 대결 국면에 접어드는 남북 분단 시대에 굳이 공산당 박해로 피살 및 실종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시복을, 그것도 81위 시복 대상자들 대부분이 평양교구 소속이어서 현장조사마저 불가능한 이런 현실에서 굳이 북한을 자극할 것을 추진할 필요성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이 안건의 청원자 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장 김정환 신부의 “남북이 여전히 분단되고, 남한 내에서도 이념논쟁이 계속되고 있어 81위 시복 추진은 자칫 종교적 반공주의의 표출, 혹은 이념 논쟁의 사례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솔직한 고백에서 이미 교회의 그런 고민이 엿보인다.

물론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에서 북한 정권으로부터 혹독한 시련을 겪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아픔을 모르는 바 아니다. 전투적 무신론을 표방한 북한 정권은 1946년 토지개혁을 한다며 종교단체의 모든 토지를 강제 몰수했다. 토지 몰수만이 아니라 종교말살정책으로 교회 구성원들에 대해 직접적인 박해도 가했다. 81위 시복 대상자 명단에서 드러나듯 한국전쟁 때는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북한군에 피살당했으며, ‘죽음의 행진’을 통해 비극적 죽음을 맞기도 했다. 북한 공산당으로부터 겪은 상처, 트라우마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오랜 기간 반공주의로 기울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번 시복 추진 움직임에 혹시 북한 정권의 박해를 피해 월남했던 이북 출신 주교들을 아직도 어른으로 모시고 있는 한국 가톨릭교회 현실이 반영된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번 81위 시복 대상자의 경우,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에 비교해서도 한국 가톨릭교회 구성원의 평소 현양의 대상이기는커녕 낯설기조차 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시복, 시성을 하는 이유가 공경하려는 것이라고 보면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 아닌가? 그만큼 준비 없이 시복이 추진되고 있음을 말해 줄 뿐 아니라, 앞에서 말한 ‘선 현양, 후 시복’의 상향식 전통마저 벗어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순교자 안중근 의사, 국채보상운동 서상돈부터 시복해야

당혹스러운 점은 이제껏 한국의 모든 복자와 성인들이 19세기 천주교 박해 시절 인물들이었던 데 비해, 갑자기 한 세기를 건너 뛴 느낌을 주는 것이다. 순서로도 일제강점기 때의 신앙 선조들을 먼저 모셔야 합당할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시대의 순교자 안중근(토마) 의사 복자 추진은 지금 주춤한 상태라 한다. 서울대교구가 2011년엔 ‘이토 히로부미 사살이 하느님의 정의에 부합한다’는 판단 아래 안중근 의사에 대한 시복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번에 발표된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 추진 대상 명단에는 빠졌다. 그 이유가 “순국은 맞지만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바친 순교로 보기엔 논란이 있다는 점 때문에 조금 더 조사하기로 한 것”인데 로메로 대주교가 복자품에 오른 것에 비춰 봐도 섣부른 판단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일제강점기 때 비록 순교는 당하지 않았지만 삶으로 신앙을 증거했던 신자들,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한 서상돈, 총독 암살미수사건 등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했던 이기당, 신자들에게 의병투쟁과 3.1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촉구한 정규하 신부와 윤예원 신부,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간도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민단 단장 방우룡 등을 오히려 시복 대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신사참배를 비롯한 교회의 친일행위를 민족 앞에 참회하는 길이기도 하다.

공산당 박해로 인한 순교자 시복, “아직은 아니다. 때가 이르다”

▲ 경기 파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 있는 홍용호 주교를 표현한 이콘. ⓒ강한 기자
그리하여 교회의 이번 움직임에 나는 “아직은 아니다. 때가 이르다”고 분명히 얘기하고 싶다. 남북화해와 일치를 도모하고자 하는 이 시대에 남북 화해의 제사장이 되어야 할 교회가 반공을 기치로 들고서 북한 정권을 자극하는 시대 역행 행위를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방한 때 분단된 한반도의 아픔을 위로하고자 하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애초에 파주 통일동산과 철원 노동당사에서 봉헌하려다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명동대성당으로 옮겼지 않았던가. 그런 배려심을 지녀야 한다.

공산당 박해로 피살 및 실종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시복 추진은 민족 통일이 이루어진 뒤에, 최소한 우리 민족에 이념이 낳는 트라우마가 치유된 뒤에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고, 그때까지 유예시켰으면 싶다. 교회가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 민족의 고난에 함께 하겠다면 설사 피해를 입었을지라도 피해자‘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도움 되지 않는 이런 움직임은 일제강점기 때의 친일행위 이상의 오명을 앞으로 교회에 덧씌워 줄지도 모르겠다.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 교회는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버려져 짓밟힐 따름이다.

순교 성인은 왜 모시는가. 교회가 하느님나라 구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셨던 그 순교의 길을 몸소 걷고자 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순교 성인을 모시기 전에 먼저 순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순교한 신앙 선조들을 내세우기 전에 우리 자신들이 먼저 지금 여기에서 순교해야 할 것이다. 피의 순교가 아니라면 땀의 순교자라도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교회를 예수 그분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일갈하셨다.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이자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로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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