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5월 31일(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요약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모순된 말을 믿으라는 단어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비밀리에 알려 주신 신비스런 단어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준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요약하는 단어입니다. 세 개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성서에는 없습니다. 3세기부터 사용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으로 세상을 떠나신 뒤, 절망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게 되면서 다시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실천을 함께 회상하면서, 그분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계셨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겨 병을 고쳐 주던 그분의 마음, 사람들을 돌보아주던 그분의 몸짓,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던 그분의 관대함이 모두 그분 안에 계셨던 하느님의 숨결이 하신 일이었다는 결론에 그들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숨결에 충실하셨으며, 평소 아버지께 기도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의 삶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같은 숨결이 그들 안에도 일하신다고 깨달았습니다.

▲ 성 삼위일체, 루카 로세티 다 오르타, 1738-9 (이미지 출처=en.wikipedia.org/wiki/Trinity_Sunday)
초기 신앙인들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의 숨결인 영이 내려 오셨다.”는 창세기(1,2)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도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도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천사의 입을 빌려 “그 수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1,20)이라고 말합니다. 루가복음서도 가브리엘 천사의 입을 빌려 마리아에게 “성령이 내려오셨다.”(1,35)고 말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이 인류역사 안에 나타나신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이었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으로 세상이 창조됐고,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예언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같은 성령이 일하셔서 예수님이 태어나셨고, 같은 성령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을 발생시킵니다. 그것이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초기 신앙공동체의 관행은 그런 믿음을 배경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신앙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도 바로 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자기 안에 살아 일하시게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돌봐주며, 용서합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인간의 관행을 넘어, 신앙인은 이웃을 돌봐 주고 용서하며, 이웃과의 유대를 강화합니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넓은 세계에 열린 마음으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요한 15,9) 신앙인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 부릅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데에 유일한 귀감이라는 뜻입니다. 그 아들 됨의 실천은 인간 욕망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그분 안에 살아계셔서 이루신 일이었습니다.

인간인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면, 행복할 것이라 상상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 세상에서도 잘살고, 죽어서도 잘살기 위한 대책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이 자기중심적 좁은 공간 안에서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넓디넓으신 하느님의 마음을 배워 그분의 자녀 되어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 마음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며, 용서하는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그런 실천을 하신 것은 하느님의 숨결이 그분 안에 살아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 신앙인도 성령을 자기 안에 영접해 같은 실천을 하도록 노력합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바로 이와 같은 일을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3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서 예수님 안에 참다운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지만, 인간이기에 그분이 한 일은 하느님의 일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들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 그 시대 신학자들이 오랜 토의를 거쳐 사용하기 시작한 삼위일체라는 단어입니다. 그들이 이 단어로써 표현하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라는 말은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에 대해 알아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성령은 하느님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실제 하느님의 숨결, 곧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도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참다운 하느님의 숨결이고 하느님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에도, 구약의 예언자들 안에도, 예수님 안에도, 하느님의 숨결은 일하셨고,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숨결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말하는 삼위일체라는 단어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다 알아들어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인간 예수와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신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듣고, 그 실천을 배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자녀 되어 삽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변화시켜 참으로 당신의 자녀 되게 하십니다. 그것은 그분의 숨결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실현하시는 일입니다. 세 분의 이름이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삶을 보고 배우며, 성령이 우리 안에 실현하시는 일에 협조해 하느님의 자녀 되어 신앙인으로 삽니다. ‘삼위일체’는 한 시대가 필요로 하였던 단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삼위일체’는 예수님도 성령도 모두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여정을 밝히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한다고 고백하는 단어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