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5월 24일(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사도2,1-11

성령강림 축일이 되면 우리는 제1독서에서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강림 장면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장면은 사실 보도가 아닙니다. 성령에 대한 초기 교회의 체험을 말하기 위해 구약성서 표현들을 빌려 각색한 장면입니다. ‘세찬 바람’, ‘소리’, ‘불’ 등은 구약성서가 하느님이 나타나신 사실을 말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들입니다. 각자가 다른 언어로 말하고 각자가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것은 바벨탑(창세 11,1-9)의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쌓아 올려서,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며 살고자 하였습니다. 인간이 진리라 생각하는 것을 연장하여 하느님을 상상하는 행위였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그들의 언어를 서로 다르게 만들어서,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셨다고 말합니다.

차이를 존중할 때 의사소통이 가능

성령강림 장면에서,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 안에 일어나는 일은 이 흩으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성령이 각 사람 위에 혀 같은 불길로 주어지자, 사람들은 각자 자기 언어로 말을 하지만, 듣는 사람은 각자 자기 언어로 이해합니다. 성령은 인간 상호 간의 차이를 존중하시고, 그 차이는 인간간의 상호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은 상호 간에 차이가 있기에 서로 보고 들을 것이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원활한 사회는 인간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아끼고 존중하며 살리는 사회이고, 그것은 다채롭게 풍요로운 사회입니다. 한 가지 말을 강요하는 통제된 사회는 인간 생명을 위축시킵니다. 강요와 통제는 생명을 죽입니다. 성령은 인간을 살리십니다. 성령은 인간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양하게 의사소통하며, 풍요롭게 살도록 하십니다. 풍요로움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자비와 용서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시오. 누구의 죄든지 그대들이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요한 20,22-23)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는 것은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 이야기를 연상하게 합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으셔서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화답송에서 함께 읊은 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이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시편 104,30) 예수님이 체포되자 모두 도망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모여들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설교하면서 자기 생명을 버리기까지 한 것은 그들이 ‘다시 소생한 것이고 그들의 모습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김인 성령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 성령강림, 알브레히트 뒤러. (1511)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개인고백 고해성사에서 사제가 죄를 용서해 줄 수도 있고, 용서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행 고해성사가 의무 사항으로 채택된 것은 1215년,(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13세기의 일입니다. 그때까지는 교회 안에 여러 형태의 참회 절차가 있었습니다. 현행 개인고백 고해성사가 도입된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되면 엄청난 보속, 곧 고행을 하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확실하게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처럼 ‘죄를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화법입니다. 한 번은 긍정적으로 말하고 또 한 번은 반복하되 부정적으로 반복하는 화법입니다. “믿고 세례 받는 이는 구원받겠지만 믿지 않는 이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마르코 복음서(16,16)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믿어서 구원받으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지 못한다는 위협이 아닙니다. ‘용서받지 못한다’, 혹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사용하지 못할 말입니다. 그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던 말입니다. 그것에 반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단죄하지도 버리지도 않으신다고 믿고 있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카 6,36)라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성서 안에 있는 부정적 표현들은 하느님 앞에 책임질 수 있게 행동하자는 공동체의 마음가짐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죄의 용서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이 복음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9)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은 그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당신의 일을 지속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 일을 하는데, 예수님은 당신 숨결로써 그들을 새롭게 만들어 주며, 그들 안에 살아 계셨습니다.

죄는 자신의 척도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

예수님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통제하는 것이 죄라고 예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요한 복음서(8,1-8)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은 당신네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니 그 아비 욕망대로 행하려고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였으며 진리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8,44) 단죄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며 마귀가 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살리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가지밖에 보지 못하는 ‘시야 협착증’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시야가 협소한 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획일성을 사람들에게 강요합니다. 하느님은 다양함을 풍요로움으로 보시는 광활한 시야를 가진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살아 계시면, 우리 주변 사람들이 어떤 자비를 체험할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요한 15,26)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실천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있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성령강림 축일을 해마다 기념하는 것은 하느님의 숨결,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의 차이를 풍요로움으로 보는 하느님의 시야를 우리 앞에 열자는 것입니다. 자비롭게 또 은혜롭게 우리 주변을 볼 수 있는 숨결로 살자는 것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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