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라의 할머니 탐구생활 - 31]

꽃샘바람이 잠잠한 날이면, 아이들과 집을 나선다. 우리 집 새 식구인 강아지 보들이도 함께다.

"가자, 산으로!"
"또 산에 가? 저수지 위에 냇가로 가자."
"냇가에 가면 너희들이 물에 들어가고 싶어 하잖아. 아직은 추워서 안 돼. 그리고 갈쿠나무(불 땔 때 불쏘시개로 쓰는 마른 잎이나 잔가지. 마른 솔잎이 가장 좋다.)도 해 와야 한단 말이야."
"그래, 좋아. 내가 엄마 도와줄게."

나이 한 살을 더 먹더니 다울이가 제법 의젓해졌다. 적어도 말로는 엄마 아빠를 잘 챙기고, 타협을 할 줄 안다.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마침내 보들이가 생기자 뭔가 활력을 얻은 것 같기도 하다.

다랑이는? 산으로 가든 냇가로 가든 어디든지 좋단다. 이제는 업고 다니기에 부담스러운 몸무게도 되었지만 도무지 업히려고 하지를 않는다. 형처럼 빨리 달리고 싶은지 작은 발로 내달리는데, 그러다가 앞으로 고꾸라질까 마음이 불안할 때가 많다. 오늘도 신이 나서 소리를 꽥꽥 지르며 다울이 뒤를 쫓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강아지 세 마리가 졸졸거리며 뛰노는 것 같아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저 녀석들, 참 좋은 때구나.' 아이들과 강아지가 있어서 산책길은 오선지가 되고, 우리의 발걸음은 그 위에서 뚱땅뚱땅 음표를 그린다. 제법 아름답고 생기 발랄한 선율이 흘러 나오는 것만 같아 나지막히 콧노래도 부르게 된다.

그런데, 꽈광! 산 입구에 들어서자 흉물스러운 쓰레기더미가 음악을 망치고야 만다. 헌 냉장고와 텔레비전, 장판과 비닐, 폐형광등에 농약병까지.... 대체 왜 이런 곳에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건지....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그곳을 얼른 지나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보들이는 쓰레기마저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탐색을 하고 있다.

▲ 우리에겐 비밀의 화원처럼 느껴지는 숲이 있는데, 거기에 가려면 쓰레기 괴물을 지나쳐야 한다.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존재들은 얼마나 흉물스러운지.ⓒ정청라

"엄마, 여기에 장갑도 있어. 누가 떨어뜨렸나?"
"야! 더러우니까 만지지 말고 얼른 와. 쓰레기 만지면 아프게 된다. 거기에 깨진 유리 조각도 있는 거 안 보여?"
"알았어. 나도 알고 있다구. 근데 사람들이 왜 자꾸 여기에다 쓰레기를 버려? 나쁜 사람들이라서 그래?"

다울이의 천진난만한 질문 앞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했다. 만약 나쁜 사람들이 버렸다고 하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거 아닌가. 그렇게 되면 우리는 나쁜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한참을 곰곰 생각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다울아, 나쁜 게 아니고 몰라서 그래. 이 땅과 산과 냇가가 다 우리 몸과 같은데 그걸 몰라서 아무렇게나 함부로 대하는 거야. 쓰레기도 마구 버리고 독한 농약도 치고..."
"왜 그걸 몰라?"
"그건 말이지...."

이번에야말로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왜 그걸 모를까? 돈 버는 데 정신이 팔려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서? 어떤 사악한 힘이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서? 아, 모르겠다. 나는 결국 얼렁뚱땅 주의를 돌리고는 아이들을 쓰레기가 안 보이는 곳으로 이끌었다. 산에 오를 때도 크고 작은 비닐 조각이나 과자 봉지 따위를 마주쳐야 했기에 눈에 크게 거슬리는 것은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솔직히 털어놓으면 죄책감을 덜 느낄 정도로 줍는 시늉만 했다고 할수 있겠다. 나 하나 노력한다고 해서 이 많은 쓰레기를 어쩔 수 있겠냐는 무력감에 젖어서)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쓰레기 태우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오는 게 아닌가. 우리 집 뒤편에 있는 도란 할머니 집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모양인데, 무얼 태우는지 냄새가 고약하기 이를 데 없다.

화들짝 놀라 열어 두었던 된장 항아리 뚜껑을 닫고 아이들을 집안으로 대피시켰다. 창문도 꼭꼭 닫았지만 그래도 틈새로 들어오는 냄새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정말이지 너무 화가 나서 욕이라도 쏟아 내고 싶은 심정이라, 나는 면사무소에다 신고라도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어떻게 신고를 하나. 신고 대상은 한 마을에 사는 이웃이고, 힘없는 할머니가 아닌가. 시골마을에서는 쓰레기를 태우는 게 당연한 일처럼 되어 있으니 할머니는 당연한 일을 하신 것뿐이다. 쓰레기를 태울 때 엄청난 유독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걸 몰라서, 나무를 태우거나 나뭇잎을 태우는 기분으로 불을 태우시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마당에서 보란 듯이 쓰레기를 태우시지.

수봉 할머니나 쌍지 할머니는 쓰레기를 연료처럼 쓰기도 한다. 개밥이나 소죽 끓일 때 나무와 함께 불에 태워 불땀을 살리는 용도로 쓰시는 것이다. 가끔 호박죽이나 팥죽을 끓일 때도 밖에다 솥 걸어 놓고 쓰레기를 태워 불을 지피는데, 그렇게 조리한 음식에는 쓰레기 태울 때 나는 냄새가 배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한 그릇 수북이 퍼다 주신 음식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몰래 버리기도 했다. 할머니들에겐 그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걸까?

그뿐인가. 쓰레기를 태우고 나온 재마저도 나뭇재와 똑같이 여기시는 모양이다. 그래서 거름에 섞어 밭에 뿌리신다. 봄을 맞아 할머니들이 밭정리를 하시는 걸 보면 마른 고춧대나 들깻대와 함께 폐비닐이나 플라스틱 농약병, 비닐끈 같은 것도 함께 태워서 그걸 밭에 고루 뿌리시는 걸 볼 수가 있다.

정말이지 얼마나 순진하신지 그 순진함에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각종 유해물질에 빠삭한 것과 달리 할머니들은 그 부분에서는 상당히 둔감하신 것 같다. 오히려 쓰레기를 태우지 않고 종량제 봉투에 담아 아랫마을 쓰레기장까지 나르는 우리 신랑을 보고 혀를 차며 말씀을 하시고는 한다.

"아따, 성격도 착실하기는... 싹 태와블제만 뭔 고생이래?"
"쓰레기 내다놓을 시간에 마당이나 쓸랑께. 나뭇가리가 수북허네 수북해."

나뭇가루가 지저분해 보인다고? 내 눈엔 마당 가득 깔아 놓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이는데... 되려 할머니 마당에 깔려 있는 슬레이트 조각과 쓰레기 조각이 더 눈에 거슬리는데... 그러고 보면 쓰레기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서는 할머니들과 내가 참 많이 다른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다 누가 맞고 틀리고 하는 식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로 함께 살아가는 일 자체가 형벌이 될 테니까. 그보다는 어쩌다 우리가 쓰레기에 둘러싸여 살게 되었는지, 쓰레기를 만드는 삶 자체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가장 생태적인 산업이라고 포장되어 있는 농사마저도 현실을 들여다 보면 쓰레기더미 위에 올라 앉아 있는 쓰디쓴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나는 결백하다는 듯한 태도로 비판을 일삼지만 나도 결국 쓰레기를 배출하는 부끄러운 삶을 되돌아보면서 말이다.

▲ 냇가에 버려진 쓰레기. 다울이가 주우러 내려간다는 걸 내가 말렸다.ⓒ정청라

다시 아이들과 길을 걸으며 눈앞의 풍경을 본다. '친환경 자재'라는 이름이 선명히 보이는 비닐 포대가 밭둑가에 나뒹굴고, 길가쪽 큰 나무는 시커먼 비닐 조각을 목도리처럼 가지에 걸고 있다. 어느덧 자연과 쓰레기가 한 몸처럼 뒤섞여 있다. 어쩌면 이것이 내 몸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감당할 수 없어 외면하고 있는 지구의 아픔과 슬픔이기도 할 것이다.

문득, '풍경'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삶, 자연에서 와서 기꺼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을 꿈꿔 본다. 그리하여 할머니들의 순진함이, 나의 분별심이 죄악이 되지 않는 날이 오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만지게 하고 마음껏 뛰어놀라 하며 아름다움 속을 걷게 해 주고 싶다.
 

정청라
귀농 10년차, 결혼 8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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