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김원호 알렉산델 인터뷰

본래 천주교 사제가 되고 싶었다고 하는데 후회는?
조부께서 장호원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옹기 굽는 교우촌에서 살았으니, 저는 태중 교우인 셈입니다. 내 인생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도 가톨릭이죠, 그렇지만 어린 시절에 경험한 가톨릭에 대해서는 좀 부정적인 인상이 많이 남아 있어요. 죄의식을 강조하고 현세를 가벼이 보고 내세를 중시한 점, 육신을 부정적으로 보고 지옥의 공포를 강조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신앙생활을 한다는 게 제대로 된 신앙인가, 싶은 거죠. 그런 생각을 가지면 삶이 축복일 리가 없고, 태어났으니까 하는 수 없이 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이 즐겁거나 기뻤던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런대도 어려서부터 신부가 되고 싶었어요. 신부가 되면 몸의 유혹도 피할 수 있고, 세속을 떠날 수도 있고, 죄 짓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살 수 있기에 최고라고 여겼던 것 같아요. 더욱이 두 삼촌과 한 사촌 형이 이미 신학교에 들어갔거나 신부가 되었으니 금상첨화였겠죠.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신부 안 되길 잘했다, 싶어요. 사제생활보다 사회생활을 한 게 나를 훨씬 자유롭게 하고 있으니까요. 여생은 자유로이 진리를 찾는 여행이 될 거라고 봐요. 나한테 이상적인 인물은 안창호, 간디 그리고 슈바이처 등인데, 이 사람들은 내성적이면서도, 이를 넘어서서 남에게 헌신한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학 시절에 철학과를 다니면서 졸업논문으로 ‘슈바이처의 생명경외’를 선택했죠. 그리고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이상을 실현하는 ‘성인’이 되고 싶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결혼도 할 수 있고 직업도 맘대로 선택할 수 있었던 거죠. 중요한 건 이상을 어떻게 몸으로 살아내느냐, 하는 거겠죠.
그래서 변리사 생활을 하게 되신 거군요.
처음엔 돈을 많이 버는 상인이 되고 싶었어요. 사람이 살면서 수신제가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 먼저 집안을 건사해야한다는 생각이 앞섰던 거죠. 그런데 어머니가 반대하셨고, 실상 저는 경제관념도 별로 없었어요. 27살에 특허법률사무소에 들어가면서 이 분야가 내 직업이 되었지만, 그냥 한 달 한 달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고 보았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술도 많이 마셨는데, 그렇게 살고도 지금 이처럼 여유를 갖고 살 수 있는 게 의아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직업생활이 순탄했던 건 아니었어요. 1974년부터 1980년까지 중앙특허에서 일했는데, 일 자체는 만족스러웠는데, 자기 오른팔이 되어달라던 고용주의 생각과 달리 사무소 직원의 동기유발과 인간관계에 더 열성을 보이다 결국 면직되었어요. 면직통지와 노조결성, 노조설립통보, 집단해고, 파업, 상호 각서교환, 사직의 길을 밟으면서 1980년 봄이 지나갔지요. 그렇게 중앙특허에서 버려진 뒤에 변리사 시험을 보고 나중엔 개업까지 했어요. 당시 면직 되고 생활이 어려워져서 아내가 처음으로 암사동에 약국을 개업한 게 다행이었죠.
‘수신제가’를 우선시하던 분이 결국 노사분쟁에 휘말리게 된 거군요.
아마도 당시 가톨릭교회가 예전과는 달리 사회정의를 위해 사회참여로 돌아서고, 개인적으로는 역사적 예수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기존의 교회 속에 갇힌 그리스도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 나타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가 내 속에서 태어난 거죠. 게다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부끄러운 생각을 들게 한 일은 1971년 11월 나와 동갑내기인 청계천 재단사 전태일이 분신한 사건입니다. 나는 수신을 첫째로 생각하여 내가 온전히 된 후에야 사회참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김수환 추기경의 1971년 성탄절 명동성당 미사강론이 갑자기 중계방송하다가 중단된 일, 민청학련 사건과 지학순 주교의 구속, 그리고 정의구현사제단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물론 1970년 4월에 창간된 <씨알의 소리>도 계속 구독 중이었는데, 신앙의 대상으로 예수를 믿기보다는 예수의 삶과 믿음에로 돌아가 세상과 내 삶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원사가 종결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들 각자를 통해 구원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변리사 생활을 하면서 지금도 사회문제에 무관심할 수 없었던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고 봐야죠.
유미특허에서도 특별한 실험을 하셨죠.
1982년 5월에 유미(YOU ME)특허법률사무소를 설립했을 때, ‘직원 모두가 가족과 같이 산다’는 공동체의 꿈을 안고, 시작했어요. 오너가 주로 이윤을 챙기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직원들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지분을 평등하게 나눠 갖는 방식이죠. 한 20년 동안 해왔는데, 경쟁사회에서 좀 버겁긴 하더라고요. 아이엠에프 이후 큰 타격을 받기도 했는데, 신자유주의 시대에 수도원 같은 평등을 유미 같은 조직에 도입하기에는 무리였던 셈이죠. 그때 절망적으로 생각한 건 ‘가난의 평등은 가능하나 부의 평등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자유와 평등의 균형을 이루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계는 평등을 위해 자유를 잃은 지역과 자유를 위해 평등을 잃은 지역의 냉전시대를 거쳐, 무조건 자유를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고, 저는 이 병적인 징후를 아픔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삶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나이 오십이 넘고서야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귀중한지 절감했습니다. 먹고사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사람구실 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사람이 태어나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먹고사는 일을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고, 그 위에서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봐요. 또 몸을 제대로 보살피고 몸의 소리를 듣고 따르는 일인데, 그 뒤에 마음, 머리 그리고 영의 소리를 순차적으로 듣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이 기본에서 어긋나면 반드시 허(虛)해지고, 제 삶을 간수하지 못하게 됩니다. 경제와 몸은 삶의 기본이므로 이를 반석으로 하여 세상과 교회를 변화시키고 하느님의 자비를 베푸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입니다.
이희연 기자/뜻밖의 소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