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이장섭 이시도로 씨 인터뷰

길 위에서 하느님을 만났다고 고백하는 사람,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이장섭 씨를 만났다. 장애아동을 위해 일하고 세상과 교회에 대한 고민이 많은 그는 자신을 ‘주님을 찾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 이장섭 씨가 꿈꾸는 공동체는 함게 아파하고 울어주고, 기뻐하고 위로를 나누는 사람들이다. 그는 길 위에서, 현장에서야 그 사람들을 만났고, 거기서 하느님을 보았다. ⓒ한상봉

장애아동 치료부터 정의평화위원회 참여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어렸을 때부터 삶에 대한 질문이 많았어요. 진리가 무엇일까? 아름답게 산다는 게 무엇일까? 사람들이 다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종교에서 해결하려고 했죠. 신을 찾고자 하는 갈망은 항상 있었는데, 학문으로 공부할 만큼 여유가 있었던 건 아니라서 그 답을 찾기가 어려웠어요. 구도자처럼 살려고 했는데 그래서 종교적인 부분엔 성실하려고 노력한 거 같아요.

신앙에 대해 줄곧 진지하셨던 모양입니다.
30년 동안 개신교 신자로 살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지 20년이 넘었어요. 그동안 성령 운동, 공동체 운동 정의평화 운동 등을 조금씩은 다 접해봤고요. 다양한 운동을 통해 이젠 흔들려도 내 속도대로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조금 생겼어요. 지금은 평안해요. 종교 안에서 이런 평상심을 갖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종교적 지식과 삶을 통합하도록 이끌어주는 가르침이 많지 않거든요. 이제 조금 균형감을 찾은 셈이죠.
제 소개를 할 때 ‘저는 뭐 하는 사람인데, 주님을 찾고 있다’라고 표현해요. ‘주님을 찾고 있다’라는 표현은 신앙을 잃어버려서 찾고 있다는 게 아니라, 그분을 완전히 알 수 없으니까 계속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거예요. 주님을 완전히 안다고 하면 그건 교만이죠.

삶에 대한 질문을 해결하는데, 특별히 영향을 준 경험이 있으셨나요?
그 전에는 그냥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는데, 헨리 나웬의 <새벽으로 가는 길>을 읽고 나서 내 생활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헨리 나웬이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했던 캐나다 ‘새벽공동체(Daybreak)’에 갔어요. 그곳에선 장애인들이 정회원이고, 모든 결정권이 그들에게 있어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보통 사람과 구별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곳에서 헨리 나웬 신부님이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돌아와서 오랫동안 장애인들과 어울려 살고 있죠.

함께 어울려 산다는 건 어떤 경험인가요?
개신교에 있을 때, 강원도 태백의 ‘예수원’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모여서 살다보면, 뭔가 따뜻한 또 하나의 천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어요. 세상에 힘든 사람들이 여기 오면 함께 울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갖고 2년 반 동안 수도생활처럼 살았어요. 하지만 세상의 삶을 산 속으로 옮겨 놨다고 해서,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 욕망, 갈등이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산에 갇혀있는데 세상의 문제는 그대로 있으니까 더 답답하죠. 단지 수도생활과 차이가 있다면 다양한 사람들이 계속 찾아온다는 거예요. 거기서 3만 명 이상 만났던 거 같아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들과 분리되어서 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었어요. 산 위에 있는 특별한 삶이 아니라 ‘정통’을 찾아야겠다. ‘정통’이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삶이잖아요. 예수님은 산 위가 아니라 항상 세리나 창녀와 함께 있었어요. 세상에 뿌리박은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세상이 진흙탕이라면 진흙탕에서 뿌리 내린 연꽃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 후에 예수원을 나와서 사회생활도 하고 결혼도 했죠.

 ⓒ김용길

산 위가 아니라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찾으셨네요.
네, 그렇죠. 특별한 곳이 아니라 세상에서 답을 찾은 거죠. 아마 내가 울고 싶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같이 울어줄 사람들이 필요했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같이 울어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 필요하죠. 교회와 절이 그런 곳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예수님이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는 현장으로 오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결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길을 더 성실하게 가야겠다고 자극 받은 건,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면서 부터였어요. 두 아버지가 단원고를 출발해서 순례할 때인데, 페이스북에서 이 분들이 아산을 지나간다는 걸 봤어요. 저 사람들을 그냥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무작정 가서 두 아버지를 만났는데 인사를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쭉 걸었죠. 저도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으니까, 그 마음을 같이 이해해 줄 수 있는 내 상황이 행복했어요. 함께 걷는 동안 많은 에피소드도 있었죠. 지나가던 차가 멈춰 서더니 지갑을 다 털어주고 가기도 하고, 택배기사가 얼음물을 배달해주기도 하고.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는 공동체를 찾았는데, 그게 길 위에 있었어요. 이 길이 교회구나 싶었죠. 왜냐하면 그곳에 하느님이 계시니까요.

하느님이 길 위에 계신다고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순수한 사람들이 있는 현장에서 내가 바뀌는 걸 느껴요. 정말 순수한 사람을 만나면 그냥 느낌으로 알겠어요. 순수해서 계산하고 따지는 걸 거부하다보니 사회에서 변두리로 밀려나기도 하지만요. 순수한 사람들을 만날 때 진짜 예수님이 계신가보다 싶어요. 그런 사람들이 모인 현장에는 사랑의 나눔도 있고 이심전심도 있어요. 거기 있으면 나도 모르게 선하게 변화해요. 그곳에 성령이 계시니까 나도 감화되어 눈물도 나고 경건해지는구나 생각하죠.

세월호 유가족이 순례하는 동안 하루 종일 비가 온 날이 있었어요. 비가 마구 내리는 가운데 미사를 드렸어요. 미사 가운데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교황님을 만나는 미사도 있었지만, 700명이 빗속에서 마음을 나누며 드린 미사가 순례의 최종 종착지처럼 느껴졌어요. 그런 현장이 내 삶에 자주 보였으면 좋겠어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현장이죠.

▲ 광화문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 봉헌되는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를 기억하는 미사. ⓒ한상봉

현장에만 가시는 게 아니라 사회교리와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릴 때 자란 곳이 봉천3동 달동네예요. 그때 거기서 교회 다니던 친구들을 지금도 만나요. 가난했지만 그 친구들과 나눴던 같은 신앙, 가족 같은 마음이 여전히 행복하게 남아있어요. 교황님 말씀처럼 가난하게 살 때의 기쁨을 아직 간직하고 있죠. 가난한 사람들이 정으로 뭉쳐 살아가면서 느끼는 그런 기쁨을 가치 있게 여기고 누구나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가난하면서도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사회교리를 알아요.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의 힘만으로는 사회교리가 지향하는 정의로운 사회가 못 오는 거죠. 가난한 이들은 힘이 없으니까. 사회교리를 통해서 이 사회의 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게 사회교리를 공부하는 목적이라고 봐요.

문제는 이승과 저승을 나누어 버리는 거죠. 저 세상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고통을 참으라고 하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으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거예요. 쌍용차 문제로 굴뚝에 올라간 사람들 보고 참으라는 건 죽으라는 거잖아요. 그 사람들을 대변해주고, 가난한 자와 함께 울고, 아픈 자와 함께 아파하는 게 그리스도인의 역할이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살려고 공부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교우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다면요?
열심히 사는 신자 분들이 참 많아요. 성당에서 활동도 열심히 하시죠. 단지 부족한 게 있다면, 사회적 실천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공허하고 삶과 분리된 신앙을 경험하는 거죠. 그건 남이 알아보지 못하는 신앙이에요. 이웃과 함께 웃고 울어줄 때, 가난한 사람들의 손을 직접 잡아줄 때 비로소 신앙이 드러나요. 그럴 때 내가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삶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는지 고민하시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현장에 가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바라봐주고 기도해주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의 모습을 진실 되게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지 않았을까요. 제가 큰일은 못해도 아파하는 이들을 바라봐주고 옆에서 같이 걸어가는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아마 누구나 할 수 있을 거예요.

 
이희연 기자/뜻밖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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