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라의 할머니 탐구생활 - 31]

시골에 살면서 처음 일이 년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마냥 좋기만 했다. 한번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던 자유가 내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자유가 버거웠고,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남들은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마냥 나 편한 대로만 지내도 되나? 돈을 못 벌면 농사라도 제대로 지어야 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결국 나는 생태적 삶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삶을 헛되이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젖어 들면 괜스레 짜증이 나고, 앞날이 걱정됐다.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시키는 대로 주어진 일을 하는 데 바빠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면, 모처럼 쟁취한 자유 시간이 무거운 고민을 안겨다 준 것이다. 나는 진정 의미 있게 살고 싶었다. 밥 먹고, 농사일 하고, 책 보고, 잠자고.... 그게 삶의 전부는 아닐 거라며 마음을 채워 줄 무언가를 갈망했다.

그러한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세시 풍속이다. 열두 달 자연의 흐름과 변화에 맞추어 옛날 사람들이 빠짐없이 하고 넘어갔던 그 무엇! 거기에는 삶의 무료함을 달래 줄 재미있는 장난거리가 있었고, 무엇보다 작은 풍속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예를 들어 대보름상에 꼭 꼬막을 올려야 한다는데, 거기에도 까닭이 있단다. 그래야 나락이 잘 여문다는 것이다. 알이 꽉 찬 꼬막을 벼 이삭과 연결시킨 그 생각의 유연함이란...! 그리고 그 속에 풍년을 바라는 간절함까지 담겨 있다. 그냥 대보름 무렵 꼬막이 제철이니까 맛있어서 먹는다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겠지만, 그렇게 의미가 담긴 꼬막의 맛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꼬막을 먹으며 황금빛 들판을 떠올릴 테니 '내년에는 어떻게 먹고 살지?' 하는 불안 요소까지 누그러뜨리는 셈이 되니까.

▲ 올해 내가 차린 대보름 밥상. 꼬막도 없고 콩나물국도 없다. 엉성하고 소박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씩 해내다 보면 언젠가는 풍성한 의미를 채울 수 있으리.ⓒ정청라

명절 때마다 차례상을 준비하며 함께 음식을 나누었던 것도 단순히 여자들을 고생시키려는 심산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람이 여럿 모인 자리에는 음식이 풍성해야 활기가 돌기 마련이고, 함께 힘을 모아 음식을 장만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식당에서 남이 다 차려 준 밥상에 둘러 앉아 와구와구 먹는 일에만 바쁜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요리와 놀이, 일과 사교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골똘히 들여다볼 때 정월대보름만큼 의미가 다채롭게 실려 있는 풍속은 드문 것 같다. 일단, 그 규모부터가 다르다.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온 마을 사람들이 하나 돠어 움직이니까. 대보름 저녁에 너른 들판에서 벌이는 '달집 태우기'를 보자. 달집을 태워 달이 나오게 한다는 상상도 기가 막힌 데다, 달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온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은다. 누구누구는 생솔가지를 베어 오고, 누구누구는 대나무를 베어 오고, 누구누구는 짚단을 챙겨 오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모은 장작가리에 큰 불을 놓아 함께 불 구경을 하는 것이다. 시린 가슴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느낌에 젖어서, 한데 모인 우리가 하나임을 가슴 벅차게 확인하면서....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합천에 살 때 달집을 태우며 달을 기다리던 그 시간을... 평소 어렵기만 하던 마을 어르신들과 어우러져 신나게 춤도 추고 소고도 두들겼더랬다. 붓글씨로 축원문 같은 것을 써서 낭독하고, 그 종이에 불을 붙여 달집에 불쏘시개로 던져 넣는 할아버지의 엄숙한 자세에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했지. 마침내 달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어떤가. 보름달을 처음 본 사람들마냥 반가워하며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비벼 모아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그 순간에는 왜 그리도 코끝이 찡하던지.... 인간의 나약함이 하늘을 향해 말을 거는 고귀한 순간, 그 순간과 일체가 되는 감동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화순으로 이사 온 뒤에는 더 이상 그런 가슴 벅찬 경험을 할 수가 없었다. 정월대보름이 되어도 마을은 여전히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하고 말이다. 아쉬운 마음에 이사 와서 첫 해는 절에 가서 보름밥이라도 얻어 먹을 생각으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부릉....' 차 시동 소리를 듣고 한평 할머니가 달려오셨다. 찰밥 수북이 한 그룻과 나물 몇 가지를 넘치게 담은 접시를 들고서 말이다.

"보름인디 어디 가? 보름상은 차렸대?"
"아뇨. 절에 가서 얻어 먹으려고요."
"집이가 차리제만은.... 우리집 찰밥도 먹어 봐. 맛날랑가 모르겄네."

그렇게 얻어먹은 찰밥과 나물은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멀리 큰 절에 가서 얻어먹은 것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말이다. 그때 당시만 해도 내가 손수 보름밥을 차려낼 생각일랑 하지도 못했던 나는, 그 다음 해부터 조금 다른 자세가 되었다.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내 손으로 대보름 밥상을 차려 보기로, 희미해진 정월대보름의 의미를 내 삶 속에서 조금씩 찾아내고 되살려 보기로.

물론 쉽지는 않았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묵나물 아홉 가지로 밥상에 나물 꽃 향연을 펼치고 싶었건만 올해도 다섯 가지 올리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달을 기다리며 모닥불 놀이라도 하자고 하여 지난해에 처음 시도해 보았지만 우리 가족끼리만 하니 아무래도 썰렁하다. 게다가 우리 마을엔 높은 산 때문에 저녁 9시 정도에야 달이 뜨니 그 시간까지 기다리다 흥겨움이 김빠진 맥주마냥 시들어버리고 만다. 우리 마을엔 왜 달집 태우는 풍습이 이어져 내려오지 않을까 궁금했었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달이 너무 늦게 떠서.

대신에 대보름 바로 전날 밤 작은 보름에, 밤새도록 불을 피워 놓고 놀았다고 한다. 생대나무를 태우며 그 위를 나이 수만큼 건너뛰기도 하고, 깡통에 불을 피워 쥐불놀이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동틀 무렵이 되면 꼭두새벽에 찐 찰밥과 전날 준비한 나물, 슴슴한 콩나물국에 무를 넣어 만든 짓국(냉국), 꼬막 등을 올려 보름상을 차려 놓고 차례를 지냈다는 것이다. 한평 할머니 말로는 이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꼬박꼬박 지켜 오던 행사였단다.

"그날은 잠자믄 안 되아. 굼벵이 된다드만. 우리 애기들 어렸을 때는 밤새도록 불 피워 놓고 놀고 그랬어. 시방도 그날은 이 방 저 방 불 다 써 논당께."

그렇다. 의미가 많이 퇴색되고 축소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할머니들은 대보름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다. 며칠 전부터 묵나물을 꺼내 물에 불렸다가 나물을 볶고, 새벽 두세 시에 일어나 찰밥을 쪄 상을 차린다. 그리하여 대보름 낮에 마을화관에 모여 나누어 먹는다.

"우리는 질이 나갖고 그냥 넘어가들 못한당께. 성가신께 안 해야지 하는데도 몸이 알아서 하는디? 시방 도시서는 대보름인 줄도 모르고 넘어간다드만...."

수봉 할머니의 말이다. 수봉 할머니는 다리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 나온 다음날에도 새벽에 일어나 보름상을 차리셨단다. 자식들이 찾아오는 명절도 아닌데, 몸에 익은 습속이라 떨쳐내기 어려우셨던가 보다.

그 얘길 들으며 이렇게 떨쳐내기 어려운 습속이 몇 십년 사이 너무 쉽게 잊혀지고 있음이 떠올라 안타까웠다. 의미가 잊혀지는 데 걸리는 시간과 의미를 되찾는 데 걸리는 시간.... 그 사이의 아득함과 막막함이란....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잃어버린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련다.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만큼 수고로워도 내 힘 닿는 만큼씩 밭을 일구면 땀방울이 보석처럼 빛나게 되겠지. 쑥대밭이 옥토로 바뀌는 만큼 내 삶에도 의미라고 하는 보물이 영글어가겠지. 할머니들의 삶이 오래된 유물과도 같이 이어지고 있어, 내게 용기를 준다.
 

정청라
귀농 10년차, 결혼 8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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