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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정청라의 할머니 탐구생활 - 30]

도시, 그러니까 화순읍에만 나가도 다울이는 신기해한다. 자기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은 데다 너나할 것 없이 서로 아는 척하지 않고 지나치는 사이인 것이 너무 어색한가 보다. 하기사, 우리 마을에서는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지나가도 일단 인사부터 하고 보는 녀석이니까.

"엄마, 여긴 도시라서 그래? 모르는 사람이 진짜 많아."
"당연하지.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다 알고 지내냐?"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투로 퉁명스럽게 답을 하곤 하는데,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다. 스쳐가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 중의 대다수가 남이라니.... 이렇게 서로에 대한 조금의 관심도 없이 어깨라도 부딪힐까 싶어 몸을 잔뜩 움츠리며 서로를 경계하는 사이라니....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대단해 보인다.

나는 도시에 가면 긴장감 때문인지 온 몸에 힘이 들어간다. 더구나 옷차림이나 외모가 도시인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 남들이 이상하게 여길까 마음이 쓰일 때도 있다. 화장을 하지 않는 데다, 고무신을 즐겨신지, 펑퍼짐한 고무줄 바지에 옷은 꼬질꼬질.... 누가 봐도 없어 보이는 외모다.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위아래를 훑어 보며 동정의 눈빛 또는 경멸의 눈빛을 보낼 때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삶을 사는 것이니 크게 마음을 두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내 영혼은 떳떳하다.'며 방어막 같은 주문을 외게 된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완전무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참 이상한 경험을 했다. 마침 화순읍 오일장이 서는 날이라 장 구경도 할겸 옥수수 뻥튀기를 튀기러 뻥튀기 집에 갔는데, 먼저 와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나와 우리 가족을 찬찬히 훑어보시는 거다. 나는 또 한소리 얻어 듣겠구나 싶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채 드디어 할머니와 말문을 트게 되었다.

"어디서 왔어요?"
"화순에서도 저어기 산골짝 변두리에서 왔어요. 농사 짓고 살고 있어요."
"어쩐지 다른 사람들 하고는 달라 보여요."
"워낙 없어 보여서 그런가요? 시골에 살다 보니 아무래도 시골티가 나죠."
"아뇨. 아줌마도 그렇고 애기들도 그렇고 아저씨도 그렇고 마음이 참 편안해 보여요. 요새 사람들 같지 않게 때가 안 묻고..."

할머니가 의외의 말씀을 하셔서 난 깜짝 놀랐다. 젊은 사람이 왜 그러고 사느냐거나, 앞으로 자식들은 어떻게 가르칠 것이며 돈 벌 궁리는 하고 있느냐는 식의 걱정과 가르침은 단 한 마디도 없이, 있는 그대로 내 삶을 존중해 주시며 고운 눈길을 보내 주시니 말이다. 그러고는 뻥튀기집 주인 할머니에게 우리 것까지 같이 계산해 달라시며 돈을 쥐어주시는 거다.

"괜찮아요. 저희 건 저희가 계산할게요."
"내 마음이 이렇게 하라고 시키네요. 별 건 아니지만 뭐라도 주고 싶어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받아 주세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미안해서 안 되겠다 싶었던지 우리 신랑은 가방에서 떡을 꺼내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출출할 때 먹으려고 떡집에서 사 둔 거였는데, 그거라도 드리고 싶었는가 보다.

"아유, 됐어요. 애기들이나 주세요."
"저희도 뭔가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알았어요.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같이 나눠 먹읍시다."

할머니는 떡을 꺼내 뻥튀기집 주인 할머니와 할아버지, 나와 우리 식구들, 뻥튀기집 앞을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 손에까지 하나씩 쥐어 주셨다. "이게 웬 떡이래요?"하고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젊은 사람들이 나눠 먹자고 주네요. 그 마음이 고우니까 맛있게 나눠 먹읍시다." 하시면서 말이다.

그랬더니만 이번에는 뻥튀기집 할머니가 커다란 쟁반 가득 과일을 가지고 나오셨다.

"우리 집에 온 손님들이 서로 좋게 지내는 거 본께 내 맘도 오지네요이. 지난 장에서 과일을 샀는디 영감이랑 둘이서 먹은께 영 맛이 없어라우. 여럿이 있을 때 노나 먹어븝시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큼직하게 썰어 우리들 손에 쥐어 주시는 거다. 이번에도 뻥튀기집 앞을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에게까지 한 쪽씩 권하시면서 말이다. 순간, 오병이어의 기적이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작은 소년이 내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결코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그 순간 그 만남이 확인시켜 주고 있었으니까.

나는 문득 하늘나라가 있다면 이렇게 열리겠구나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마주치는 이의 삶을 한없이 거룩하고 고맙게 여기며 서로를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넘칠 때, 그런 마음이 있는 곳에 하늘나라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건 바로 그런 순간순간을 통해 드러나는 것일 것이다.

그 만남 뒤로 나는 낯선 사람을 만날 때도 어떤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었다. 설령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이라 하여도, 내가 먼저 그의 삶에 관심을 보이고 따듯한 눈길을 보낸다면 햇살에 눈 녹듯이 얼음장 같은 마음에도 포근함이 감돌 수 있을지 모르므로. 그러면서 작은 것일지라도 내 것을 먼저 나눈다면, 그도 결국 마음을 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작은 기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 생애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 같은 것은 아닐는지....

뻥튀기 집에서 만난 할머니가 내게 그와 같은 마음을 씨앗처럼 심어 주시고 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은 한 줄기 빛이 되어 내 삶의 이정표가 되어 준다. 요새 한창 인사하는 재미에 빠진 다랑이가 낯선 이를 향해 "안녀엉...."하고 인사할 때, 온 마음으로 웃어 주는 이가 점점 더 많아지기를. 그렇게 너와 나 사이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늘나라를 꽃 피워 갈 수 있기를...!

   
▲ 혹독할 정도로 모진 바람이 몰아치는 가슴 시린 세상이다. 그럴수록 따뜻한 만남을 꽃피워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마주치는 모든 만남 가운데 하늘나라 씨앗을 심어 보자.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분 말씀이 이루어지도록.ⓒ정청라

 

정청라
귀농 10년차, 결혼 8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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