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 요한 1,1-18.

성탄 축일은 예수님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날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고, 그분이 출생하자 동방에서 세 박사가 베들레헴에 와서 참배하였다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서는 동방의 세 박사 이야기는 하지 않고, 우리가 밤 미사에서 들은 대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구 조사령이 있었고, 요셉이 만삭의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다가 외양간에서 예수를 출산하여 구유에 눕혔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모두 생략하고, 예수님은 그 생명의 기원이 하느님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보여 주는 빛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고도 말합니다. 모두가 그분을 빛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은총과 진리의 시대가 열렸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에서 은총과 진리를 배우라고 선포합니다. 유대교는 율법 준수만이 하느님에게 가는 길이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은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 베풀고, 용서하고, 보살피시는 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과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요한 20,22 참조)

우리 교회의 현행 고해성사 양식은 13세기에 법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고해성사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보속을 하던 시대였습니다. 개별 고해성사를 도입한 것은 사람들이 그런 엄청난 보속을 하지 않도록 하느님의 용서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 고해성사는 우리가 그것을 통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인류역사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종교 집단의 기득권자들도 그들의 권한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횡포에 시달리고 짓밟혔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제자들을 타이르셨습니다. 당신도 섬기는 사람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둠은 그분에 대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둠은 섬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 성탄. 프라 안젤리코.(1441)
오늘 성탄은 하느님의 말씀이 작고 연약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들도 행복해야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분의 삶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를 배웁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면서 축복하였습니다. 그분은 절망에 우는 이들을 그 절망에서 살려 내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종교 기득권자들은 그분 안에 은총과 진리를 보지 못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둠을 더 좋아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4 참조)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이웃을 돌보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둠입니다. 이웃이 잘못하면, 잘못한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둠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용서는 우리의 삶을 비추는 빛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용서하고 보살피며 생명을 살리는 일은 우리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져야 할 것, 해야 할 일이 많아서,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는 우리의 삶 안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일에 골몰한 나머지, 우리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말씀을 성당 건물 안에 가두어 둡니다. 우리는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백성입니다.

성탄은 그 말씀이 우리의 실천 안에 나타나고,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드님’이십니다. 우리가 배워서 우리 안에도 그 은총과 진리가 자라야 합니다. 진리는 심오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용서하고, 보살피고, 살리는 일을 할 때, 우리 안에 은총과 진리가 있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 자녀의 실천 안에 있습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강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태어나, 구유에 누운 한 아기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자유 선택을 기다리는 생명입니다. 은총과 진리는 우리가 찾아서 우리의 삶 안에 성장하게 해야 하는 연약한 생명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 그분의 은총과 진리가 자라게 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보살피며 살리는 데에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과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만 소중하게 보려는 우리의 어둠 안에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의 빛이 오늘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어두운 관행을 벗어나,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여 새롭게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실천 안에 은총과 진리가 살아 숨 쉬며 살아 있게 해야 합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기쁨의 축일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은 없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집착하고 욕심내는 것은, 구약성서 한 구절을 빌려 말하면,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욥기 14,1-2) 것들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베들레헴 외양간의 구유에 누운, 어린 예수 안에 당신 스스로를 나타내셨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가 충만할 것을 호소하면서, 예수님은 오늘 구유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복음의 말씀대로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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