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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별과 축복_라베르나를 떠나며[성 프란치스코의 길, 가난의 길 - 21]
황인수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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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24  14: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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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9월 30일, 성 예로니모의 축일 저녁, 라베르나 수도원 식당에서 작은 형제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고별사를 읽는다고 한다. 1224년 9월 30일 성인이 이곳을 떠나면서 했던 고별 인사를 맛세오 형제가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을 읽는 것이다.

“... 우리들, 안젤로 형제, 실베스테르 형제, 일루미나토 형제와  맛세오 형제에게, 거룩한 오상을 남겨 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이곳을 특별히 마음 써서 돌보도록 명하시고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셨습니다. ‘안녕, 안녕, 안녕히, 맛세오 형제!’ 그리고 안젤로 형제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습니다. ‘안녕, 안녕, 안녕히, 안젤로 형제!’ 실베스테르 형제와 일루미나토 형제에게도 같은 인사를 하고 덧붙이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 평화 속에 머무십시오. 내 몸은 여러분을 떠나지만 여기 내 마음을 남겨 둡니다. 나는 하느님의 양 형제와 함께 떠나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갑니다. 나는 더 이상 여기 돌아올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떠납니다. 모두들, 안녕, 안녕, 안녕히. 산이여 안녕! 베르나 산이여 안녕! 천사들의 산이여 안녕! 사랑스런 매 형제여 안녕! 내게 시련을 안겨 준 사랑이여 고맙다. 바위 절벽이여 안녕! 나는 너를 다시 볼 수 없으리라. 바위여 안녕! 네 갈라진 틈에 나를 품어 악마를 우스갯거리가 되게 한 바위여 안녕! 우리는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천사들의 성 마리아여 안녕. 영원한 말씀의 어머니인 그대에게 여기 있는 나의 아들들을 맡긴다.’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내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떠나시면서 그분도 우셨습니다. 그분은 떠나시면서 우리 마음도 가져가셨고 우리는 이렇게 위대하신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되었습니다....”

   
▲ 절벽 위의 틈. 악마가 성인을 떨어뜨리려 할 때 바위가 성인을 안아 보호했다고 한다.ⓒ김선명

나무 수사와 함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라베르나를 떠난다. 오상 경당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뒷걸음질 쳐 경당 문을 나선다. 언젠가 로마 근처 산 위에 있는 삼위일체 성지에 순례 갔을 때 순례자들이 동굴 벽에 그려진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뒷걸음으로 동굴을 빠져나오는 것을 보았었다. 하느님의 집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이런 것이겠지. 끔찍한 고통 이후 오상을 몸에 받고 라베르나를 떠나던 프란치스코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프란치스코를 해치려는 악마에 맞서 절벽의 바위도 그를 품어 지켰던 곳. 아침 여명이 밝을 때면 높은 소리로 울어 기도 시간을 알리던 매도 프란치스코가 아플 때는 숨을 죽였던 곳. 평생을 함께하던 형제들이 남아 있는 곳, 그곳을 이제 떠나려 한다.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예감하는 그는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마음을 여기 남겨 둔다고 했지만 그 제자들은 성인이 자기네 마음마저 가져가 버렸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랑의 이야기이고 고통의 이야기이며 대대로 마음에 새겨져 전하는 형제들의 이야기다.

   
▲ 오상을 받는 프란치스코(왼쪽), 레오 형제에게 준 축복문.ⓒ김선명

보나벤투라 경당에 들러 아폴리네르 수사님의 축복을 받고 성지를 나섰다. 수사님은 아주 고요한 표정을 지닌 분인데 콩고 출신이란다. 기도를 해 주신 다음 ‘레오 형제에게 주신 성 프란치스코의 축복문’을 빌어 우리를 축복해 주셨다.

“여러분의 순례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하느님께서 이 길 동안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어
순례를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아멘.”

누구에게나 순정이 있다. 그 순정을 다 바치는 것, 거기에 우리 사랑이 있다. 스스로는 자신이 어떻게 여겨질지 몰라도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릴 때, 내 순정을 온전히 바칠 때, 그때 사랑은 완성된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이고 그것이 우리가 바칠 사랑이다. 그밖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라베르나는 평생에 걸친 프란치스코의 사랑이 그 얼굴을 찾은 곳이고 그의 순정이 완성된 곳이다. 실질적으로 여기서 그의 삶은 완성되었던 게 아닐까, 이 다음부터는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가 덤이 아니었을까. 라베르나를 떠나는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떠올리며 늘 그의 곁을 따르던 레오 형제가 사부가 적은 성경 친필을 얻고 싶어 했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해 본다. 사부가 떠날 시간이 가까워 오고 혼자 걸을 지상 순례길에 힘이 될 기념물을 얻고 싶어 하는 제자의 마음. 민수기 6장의 말씀을 빌려 제자를 축복해 준 성인의 축복문을 나도 속으로 되뇌어 본다.

“주님께서 그대를 축복하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며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시고 그대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당신 눈길을 그대에게 두시며 그대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주님께서 그대, 이냐시오 형제를 축복하시기를.”
아멘.

   
ⓒ김선명

 
 

황인수 신부 (이냐시오)
성바오로수도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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