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교 신부] 12월 7일 (대림 제2주일) 마르 1,1-8

눈을 쓸지 않으면

눈이 내립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하루를 빼고 계속 눈이 내립니다. 이른 아침 일어나 성당 마당에 쌓인 눈을 치웁니다. 성당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는 작업은 중요합니다. 성당이 산 중턱에 있어서 치우지 않은 눈이 얼어 버리면 차량을 주차할 수 없고, 어르신들이 미사에 나오시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눈이 내리면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합니다. 두 시간 동안 밀고 쓸고.... 땀이 흘러내립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튼튼하게 단련시켜 주는 성당 구조에 한숨 섞인 감사를 드리곤 합니다.

대림 2주일입니다.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본당 사목에 대한 방향을 알리는 글을 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대림에는 도저히 글을 쓰지 못하겠습니다. 교구 사목방침에 맞춰서 본당에서 어떤 사목을 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어렵습니다.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면 일상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시작”

복음은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궁극적 의지에 대한 기쁜 소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느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선포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선포의 대상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하느님 구원 의지를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면 하느님의 세상 피조물에 대한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는 유일한 길은 예수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 구원의 기쁜 소식은 광야의 선포자로부터 시작됩니다. 엘리야가 불타는 마차를 타고 하늘에 올랐던 요르단 강 근처에서,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한 회개를 선포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를 연상시키는 옷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행자적인 상태를 드러내는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흔히 광야를 인간이 회개하기 위해서 세상을 버리고 떠나오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광야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광야는 하느님이 가까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잡함과 도시를 떠나서 하느님을 찾아서 광야로 나갑니다. 광야는 회개의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선포합니다. 거룩함의 체험은 죄를 지니고 사는 자신의 어둠을 보게 만듭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거룩함 속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 사람은 더 이상 죄 속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룩함 안으로 들어갑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는 하느님께로의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방향 전환은 하느님 구원 계획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하느님 구원 계획에 대한 인간의 응답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세례는 어떤 각기 다른 사건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면서 선포의 궁극적 목표를 제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는 증언합니다.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는 자이며, 그분께서는 마지막 때의 선물인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이시라고 선포합니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그의 궁극적 사명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그것은 “준비”입니다. 기다림을 넘어선 준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로 하느님 구원사건,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시킵니다.

정의라는 가치에 기초한 방향 전환

기다림의 밑바탕에 필요한 것은 가치입니다. 가치가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기다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가치는 곧 희망이기도 합니다. 가치는 희망을 통해서 오늘의 삶의 상태를 지속 혹은 변형시킵니다.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걷게 됩니다. 저는 이런 상태를 “깨어 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을 위한 내, 외적인 준비이기도 합니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잘 느껴지지 않는 사회입니다. ‘중규직’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습니다. 그리고 청년들과 아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보다는 슬픔의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들에게 내일은 희망이 될 것인가 아니면 절망이 될 것인가?’

교회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교회가 선포하는 희망이 구체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단순히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감성적인 단어로 선포됩니다. 마치 ‘엄마 찾아 삼만 리’를 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울고불고 감동합니다. 그런데 그것뿐입니다. 하느님 자비를 관통하고 있는 정의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래서 어느새 신앙은 저승을 획득하기 위해서 이승을 잘 견뎌야 하는 부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시킵니다. 그리고 그 준비는 하느님을 향한 방향 전환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방향 전환은 구체적인 관계 안에서 증명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정의’에 기초한 방향 전환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감성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언어입니다. 감성적 언어로 선포되는 말씀은, 말씀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 내려고 이용하는 장사꾼의 호객행위입니다. 저는 교회가 하느님 백성을 상대로 장사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교회가 우리 사회 안에서 희망을 전달하는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또한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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