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교 신부] 12월 22일 (대림 제4주일) 루카 1, 26-38

12월 첫날부터 눈이 내립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요즘처럼 반복되는 눈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눈 쌓인 산과 들을 바라보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쌓인 눈을 치워야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옵니다. 이제 몸에 눈을 치우는 근육이 따로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대림 제4주일입니다. 달력을 바라보면서 주어진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어제라는 오늘을 지내고 다시 지금이라는 오늘을 보내면서,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저의 상태를 점검하고 성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

‘나는 어떤 문제를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되기를 진정 원하고 있는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관계 속에서 산다는 것은, 제가 살아 있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관계를 맺고 있는 저 자신도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생명을 지닌 존재만이 관계를 맺습니다. 제가 마주하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은 제 삶을 드러내는 문입니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면 살아 있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존재와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경험되는 감정과 느낌에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감정과 느낌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존재의 상태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경험하는 감정과 느낌을 통해서 저의 현실을 파악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제가 지닌 문제에 당신의 빛을 비춰 주시기를 청합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순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이든 마지막이든 구원을 베푸실 때는 언제나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 구원이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은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자 아브라함은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은 맹목이 아닙니다. 순종은 하느님 창조의 선물인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질문을 통해서 순종은 가야 할 길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질문하지 않으면 맹목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유의지를 거스른 순종은 굴복입니다. 굴복은 공포의 결과이지 자유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죽음입니다.

마리아와 즈카르야의 차이

마리아는 묻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표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실현되리라는 것을 믿으면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고 합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믿을 수 없음에 대한 변론이고, 확실한 보증을 위한 요구입니다. 그래서 즈카르야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자주 이런 질문을 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고 어둠이 눈을 가리고 있을 때, 세상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와 하느님 가르침 사이의 충돌이 발생할 때 이렇게 묻습니다.

“이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 주시오”

마리아의 질문은 하느님의 개입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사실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의 질문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루카 사가에게 중요한 것은 마리아의 질문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곧 ‘동정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믿는 자에게는 표징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표징을 보여 주십니다. 엘리사벳의 잉태에 관한 소식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 아들을 잉태했고, 아들을 잉태한지 벌써 여섯 달이 지났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어머니가 돼야 하는 여인에게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여인이 아들을 잉태했다는 소식보다 더 큰 표징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잉태가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서 이뤄졌다는 것은 하느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사건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잉태하는 과정에서 들려 준 하느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전 안에서가 아닌 불경과 거룩함이 상존하는 땅위에서 하느님의 힘이 마리아를 감싸 주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성전이 아니라 사람 가운데 당신 거처를 정하시는 분, 구약의 강물을 넘어서 새로운 시대를 선포하시는 분께서 오십니다. 새로운 시대를 선포하시는 하느님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나와 교회 그리고 사회 더 나아가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으로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구세주로서 고백하고,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삶을 문제 해결의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

마리아 덕분에

마리아의 순종에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순종으로 임마누엘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셨고,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서 새로운 백성의 모임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순종으로 시작된 새로운 백성이 된 ‘나와 너’ 즉 ‘우리’는 새 시대를 향한 여정을 동반합니다.

말씀이 완성되자 천사는 떠납니다. 그 이후에는 침묵이 느껴집니다. 위대한 사건 뒤에 남은 침묵, 이 침묵은 잉태를 출산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백성인 교회 공동체는 침묵의 결실을 세상 속에 드러내야 합니다.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으로 이루어진 순종을 통해서 교회는 세상 속에서 예수를 증거합니다. 맹목이 아니라 순종으로....

행복한 성탄 되십시오.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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