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저, ‘청동정원’, 도서출판 은행나무, 2014

“최근에 S대를 방문해 도서관의 카페에서 차를 마신 적이 있다. 내 앞에 앉아 빵 봉지를 뜯는 남학생은 한참 어려 보였다. 1학년인지 2학년인지 가늠되지도 않았다. 저렇게 어린 애들이 뭘 안다고 민주주의를 외치고 혁명을 논했는지. 젊디젊은 우리의 어깨가 왜 ‘독재타도’와 ‘직선제 개헌’이라는 무거운 시대의 짐을 짊어졌는지.... 군부의 총칼에 맞서 돌멩이를 들고 싸우던, 겁 없는 젊음이 역사를 바꾸었다.”(159-160)

캠퍼스는 시끌벅적했다. 선배들은 후배들의 성향이 어떤지 파악하고, 어리숙한 의식화 작업을 한다. 첫 세미나를 하는데 한 선배가 ‘이란의 후세인’, ‘다목적군’ 이런 표현을 쓰는 순간 신뢰감이 꽤 떨어졌다. 어쨌거나 우리 동기들은 80년대를 이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군사 정권이었고, 많은 게 미완이었다. 책을 읽을 때 신앙을 흔들리게 하는 구절이 나왔다고 찌질하게 덮거나 해서는 안 된다. 우리도 조심스럽게 혁명을 이야기했다. 경대의 죽음으로 신촌 일대가 일시적으로 ‘해방구’가 되었다. 이후 정원식 사건으로 한참 싸늘해지고, 그해 겨울 “절대적인 남의 것”도 무너져 내렸다. “생각해 보면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시대는 금세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소설이 80년대를 불러온다

▲ 이미지 출처 = 도서출판 은행나무 홈페이지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잘 알려진 최영미 시인이 이 소설로 1980년대를 다시 불러온다. 누군가의 죽음은 70년대의 문을 닫고 80년대의 문을 열었다. 모든 정규 방송은 중단되고 영정 사진 뒤에 장송곡이 흘러나온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고 그저 어수선하다. 김대중은 간첩이란다.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살짝 흘러나오고,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던 사람이 어느 날 얼렁뚱땅 대통령이 된다. 은행에서는 5공화국 기념주화를 판다. 5공화국은 복지국가를 지향한다고 한다. “<One Way Ticket>이 1980년 서울의 하늘을 점령했다. 디스코와 군부독재는 어울리는 조합이다.”(109)

주인공 예린은 지긋한 고등학교 시절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다. 대학에 들어가면 잔뜩 낭만을 거머쥐려 했건만, 세상은 낭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학우는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사가 되어야 했으며, 캠퍼스는 그 전사를 양성하기 위한 ‘훈련장’이었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자본주의 발전연구’, ‘제3세계 종속이론’, ‘러시아혁명사’ 같은 책을 통해 이론의 무기를 획득해야 했다. “80년대에는 대학가만 아니라 중산층이 밀집한 반포의 서점에서도 ‘혁명’을 내건 책들이 잘 팔리는 상품이었다. ‘빨간 책’들은 젊은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구호를 외치거나 돌을 던지지는 않지만 서서히 5공화국을 무너뜨렸다.”(211)

책 속에 나오는 ‘전사’들의 총알 같은 은어가 눈에 띈다. “스트(ST) 수준을 높여 엘엠(LM)과 에스엠(SM)이 연대해야 해. 아메는 다이조(大中)가 아니라 와이에스(YS)를 선택할 거야.”(116) 이게 뭔 소린가? 하긴 그때에는 SK(남한), NK(북한), KIS(김일성), 스몰키스(김정일), 러알(러시아혁명), 임페(제국주의) 같은 말들이 넘쳐났더랬다. 이런 말들이 90년대에도 조금 남아 있기는 했다.

예린은 시대의 억압 속에서 고질병을 얻는다. “80년대가 내게 준 가장 끔찍한 형벌은 배설장애다.”(135) 질풍 같은 시간을 보내다가 사랑도 싹튼다. 저자는 이때 당시에 그토록 유행했던 ‘동지적 결합’이라는 말을 안 썼는지 모르겠다. “그는 대학가에 떠도는 온갖 논쟁에 빠삭했고, 현란한 언어로 나를 사로잡았다.”(147) 하지만 그 사랑은 또 다른 폭압이었다. “동혁은 나의 지각을 삶 전반에 대한 잘못된 태도와 결부시켜, 철학적이며 사회학적인 용어를 동원해 오래도록 나를 비판했다.”(186) 그리고 구타를 자행하는 남자였다. 예린은 시대의 억압에 맞섰는데, 한 남자의 일상적 억압에 갇힌다. 이른 결혼 생활을 정리함으로써 하나의 억압을 제거한다. 운동의 핵심은 억압에 대한 저항이건만 또 다른 억압을 창출해 내는 메커니즘은 도대체 어디서 발생할까?

시대는 급격하게 흘러가고 밀고 당기는 형국이다. “1984년 2월 29일, 전국의 모든 대학에서 사복경찰이 철수했다. 전경이 사라진 캠퍼스에 자유와 민주주의, 웃음과 박수소리가 넘실댔다.”(161) 잠시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가 다시 강경 국면이 도래한다. 1986년 수천 명의 학생이 달려간 건대 사태를 비롯해서 그러다가 마침내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 분실에서 이십 일 뒤인 1987년 1월 14일, 나와 비슷한 이유로 잡혀온 어떤 청년이 수사관들에게 물고문을 당해 죽었다.”(226) 박종철의 죽음은 민주화의 열기를 가속화했다.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거세지자 정부가 4월 13일 모든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4․13 호헌조치’를 단행했다.”(226) ‘호헌조치.’ 2학년 때 꽤 좋아했던 후배가 물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기를 쓰고 설명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개헌을 향한 집중적 투쟁 속에서 드디어 “6월 29일,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고 김대중의 사면-복권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정말 약속을 지킬까? 군이 이대로 물러날까? 반신반의하면서도 우리는 승리감에 도취했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7년 만에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이 열렸다.”(232) 학교 수업 중이었는데 사회과 교사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어딘가 있다가 ‘노태우가 항복했단다’ 했던 그때다. 이로 인해 예린은 80년대를 괴롭혔던 고질병으로부터, ‘들코락스’로부터 해방된다. “관악서 유치장에서부터 나를 괴롭힌 변비가 뚫리며, 나는 과거의 터널에서 탈출했다.”(233)

이론이 우리의 삶을 구원할까?

예린에게 80년대는 여기까지처럼 보인다. “난해한 사회구성체 논쟁, 조직 노선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이론 투쟁, 조잡한 지하 팸플릿을 도배한 섬뜩한 슬로건들이 내겐 생경했다. 독재타도, 자유, 민주주의 정도면 내겐 충분했다. 당연한 일을 하는 데 그렇게 많은 이론이 필요한가?”(163) 90년대에도 그랬지만 사실 이론은 장황했고 관념적이고 우리 현실의 구체적 삶도 담아내지 못했다. 과학을 내세웠으나 사변으로 가득 찬 상태를 향해 ‘관념 딸딸이’라는 거친 말도 쏟아냈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마지막 테제 “이제까지 많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여 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는 그때 그런 상황을 엄밀히 들여다보게 해 주는 문구였다. 예린의 말처럼 이론은 장황했지만 ‘독재타도, 자유, 민주주의’가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구원해 준다고 본다면 역시 나이브하다. 1987년의 거친 아우성과 움직임이 기껏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얻는 데 그쳤던가? 하지만 대다수 시민은 거기에 만족했을 가능성이 크다. 6월이 789로 뻗어가다 멈추어 버린 것이 그런 현실을 보여 주는 게 아닐까.

예린은 이후 직장 생활도 하고 작가로 성장해 간다. 전두환 비자금과 관련해 많이 이야기되었던 출판사를 가리키는 제국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나의 ‘적’이었던 독재자의 아들을 매일 보며, 자기 분열을 겪으며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다.”(271) 그런데 소설 서두에서 서울역 회군을 이끈 ‘심재천’부터 창비(창조와비판사), 문지(문학과지식사), 제국출판사까지 작가가 이름을 조금씩 바꿔 쓴 부분은 많이 어색하다.

예린은 다시 80년대를 돌아본다. “불현듯 젊은 날의 초상 같은 책들을 다시 소유하고픈 욕망이 솟구쳤다.”(307) “내가 버린 책을 다시 사러 헌책방에 왔다.”(307) “청동기시대의 유물 같은 이념서적들은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중고 서점에 넘겼다. 검은 밑줄이 그어진 나의 ‘변명’은 어디 있을까.”(307) “80년대가 내게 남긴 것은 이념이 아니라 ‘정서’이다. 이념이나 사상은 변할 수 있지만, 정서는 변하지 않는다. 옷을 고르는 취향, 타인을 대하는 태도, 말버릇이나 헤어스타일은 한번 굳어지면 평생을 간다.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 정의에 대한 갈증, 돈과 악수하지 않는 손, 권력에 굽실거리지 않는 허리를 그 시절은 내게 물려주었다.”(308) 그 시절에 대한 패배감도 찬양도 없이 그저 한 시대를 살아냈다는 담담함을 엿보게 하고, 그 시대가 일정 정도 우리에게 중요한 정신적 유산을 남겼음을 이야기한다. 한 시대는 박제화되고 그저 정서의 차원으로 치환된다. 그 간단치 않은 시절에 대한 가벼운 소회가 불편하지만 또한 그것이 현실이 아니겠는가.

80년대는 그저 선배들의 이야기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80년대의 영향 속에서 그리고 멀찌감치 지켜볼 나이였지만 어느 정도는 그 시대와 호흡하면서 살아왔다. 그 힘겨웠으나 황금 같던 시절의 유산이 정말 이 나라의 맑고 푸른 에너지로 전환되었을까? 과연 제대로 성찰하고 제대로 이루기나 한 건가? 아주 심하게 말하면 그저 몇몇 소수에게만 전리품을 안겨 준 빛깔만 찬란한 한바탕 잔치였을까? 소설 속의 담담함이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을 복잡하게만 한다. ‘아 옛날이여’ 하기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많은 것을 던져 준 시절이기에.
 

김지환 (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현재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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