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코틀러, "필립 코틀러의 다른 자본주의", 더난, 2015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빈곤층을 위해서는 거의 무익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소수를 위해서만 막대한 소득과 부를 창출할 수밖에 없는지에 관한 처음의 의문을 다시 되짚어보자. 이는 자유시장 또는 통제받지 않은 자본주의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파괴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이다. 왜냐고? 자본주의는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진 소비자에 기반을 둔 경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102쪽)

자본주의는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일까?

자본주의란 좋든 싫든 우리의 현실이다. 언젠가 자본주의는 자본을 거부했던 조류라든가 아이콘도 상품화한다는 걸 직시하고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서 자본주의의 무서운 힘을 확인했다. 자본주의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정서적으로야 거부감이 들 때도 있지만, 마르크스도 지적했듯이 그건 역사적 구성물이다. 그는 확실히 자본을 악으로 규정했다기보다 그것의 유효성에 주목했다. 역사적으로 진보적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게 어느 순간 약발이 떨어진다는 점을 밝혀낸다. 그게 과학이다. 그 과학적 바탕 위에서 다른 세상을 그려냈지만, 역사 속 다른 세상을 향한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 좌절한다는 것. 인간의 숙명이다. 기존의 틀거리가 불온시하는 것에 눈 돌리고 투신하면서 세상이 흔들리고 조그만 틈새 사이로 다른 세상이 엿보인다. 다음 세상이 어떠한 모습이라 못 박는 결정론적 사유는 사실 마르크스의 몫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믿는 사람도 많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많은 사람이 스스로 거부하고 싶은 것에 복종하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특히 현 시대의 패악적인 상품관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돈과 상관없이 매한가지이기 힘들고, 인간관계도 상품관계의 성격이 그대로 투영되곤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를 향한 가장 핵심적 비판일 것이다.

가끔은 자본주의를 밑동부터 비판했던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세상은 어떠한 모습이었으며, 만약 지금의 자본주의를 보았다면 어떻게 평가했을까 궁금해진다. 우리는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수정자본주의’에 대해 잠깐 배운다. 그러니까 이는 자본주의가 어떤 규제도 없는 자유방임으로 갔을 때 드러난 폐해를 막기 위한 방안이었다. 자본주의에 없던 ‘경제계획’이라는 개념도 생겨난다. 자본주의는 참 복잡하다.

자본주의 너머를 꿈꾸던 많은 열혈청년들이 언젠가 ‘착한 자본주의’로 전향(?)하면서 시장 조절에 대한 제대로 된 국가의 역할에 주목하기도 한다. 정경유착이 아닌 시민에 통제되는 국가권력이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어느새 국가가 ‘비빌 언덕’이 되었지만, 이는 너무 멀고 시장의 힘은 지나치게 세졌다) 이런 입장에 대해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우리로 치면 ‘줄,푸,세’ 외치는 사람들은, 이들을 ‘좌빨’로 매도한다. 진정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장하준 교수 같은 케인스주의자에게도 그런 시선이 있었던 듯하다. 우리는 이처럼 자본주의를 놓고도 매우 다양한 시각차를 드러낸다. 이 시점에서 한 ‘착한 자본주의자’에 주목한다.

비즈니스의 거장 코틀러, 자본주의를 비판한다고?

▲ 필립 코틀러, "필립 코틀러의 다른 자본주의", 더난, 2015
이 책의 저자 필립 코틀러.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경영학 분야에서는 꽤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마케팅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계적인 마케팅의 대가로, 기업 경영에서 생소했던 마케팅이라는 개념을 널리 확산시켰다. 그렇게 자본주의의 최전선이라 할 만한 분야에서 활약한 인물이 왜 이제는 자본주의를 향해 과감한 비판을 하는 것일까? 게다가 “21세기 자본”의 저자 피케티를 인용하면서 지금 자본주의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와 동갑내기에 같은 달에 태어난 피케티의 분석은 지금 자본주의의 실체를 확인시켜 주었다. 자본소득이 압도적으로 증가하면서 소득 불평등이 극심해졌다. 코틀러는 피케티의 분석에 동조하면서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해 많은 점을 걱정한다. 그는 빈곤, 최저임금, 일자리문제, 높은 부채 부담, 너무 비싼 환경비용, 경기 변화가 심한 경제 사이클 등 자본주의에 내재한 14가지 모순을 열거하고, 각각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데, 특히 소득 불평등의 문제에 주목한다.

물론 코틀러는 자본주의를 적극 옹호하면서 가장 현실적인 경제체제임을 역설한다. 자본주의가 강력한 힘을 갖는 것은 역동성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틀러가 꼼꼼히 살펴보니 현재 자본가들은 창의성이나 슘페터가 말했던 ‘기업가정신’이 아닌 자본소득으로 부를 증대할 뿐이다. 모든 부는 그들에게 빨려 들어가고, 소득 불평등은 훨씬 극심해진다. 언젠가 자본주의가 창출했다고 자랑해마지 않았던 중산층도 붕괴되고 있다. 이런 양극화는 결국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죽여 버린다. 또한 자본주의가 상품과 서비스를 살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진 소비자에 기반을 둔 경제 시스템이라 할 때 소득 불평등은 자본주의 자체에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

코틀러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본주의의 최대 수혜자인 슈퍼리치와 슈퍼리치에 매수된 정치인은 자본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세력이다. 코틀러는 자본주의가 온전히 작동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의 적절한 규제와 개입을 지지한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자유방임의 주창자로만 여겨졌던 애덤 스미스도 자본주의의 전제조건이 ‘도덕성과 예절’임을 강조했으며 남보다 앞서나가기 위한 ‘야성적 충동’을 강조하는 자본주의는 아마도 거부했을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코틀러의 처방에서 귀 담아 들어야 할 것들

이 책을 쭉 읽다 보면 코틀러가 지적한 미국의 상황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경제는 소득 불평등뿐만 아니라 부채로 지탱되는 경제이며, 마치 위험한 시한폭탄 같다. 코틀러는 미국경제의 문제점을 분석하면서 2008년 금융위기가 일어난 이유를 아주 명쾌하게 풀어내는데, 미국이 처한 문제는 다른 발전한 사회에서도 유사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사회에서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심각하다.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실업률은 더욱 올라가고, 빈곤층도 더 많이 늘었다.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고 있다. ‘세 모녀 사건’을 비롯해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한 사건들도 많다. 도대체 그 많은 1인당 국민소득에 해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정치권에서도 이에 대해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여당 원내대표의 발언은 그 발언만 놓고 보았을 때 마치 영화 “독재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찰리 채플린이 행한 주옥같은 연설을 연상시킨다. 야당 대표는 경제를 강조하고, ‘소득주도성장론’을 내놓았다.

코틀러 주장의 귀결점은 거듭 말하건대 결국 자본주의의 온전한 작동에 있다. 코틀러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자본주의의 폭이 무척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절감하게 된다. 코틀러는 ‘카우보이 자본주의’, ‘카지노 자본주의’라 부르는 ‘고장난 자본주의’의 폐해를 목도하고 자본주의의 쇄신을 강조한다. 그 이름이 ‘온정적 자본주의’, ‘인도적 자본주의’, ‘인간적 자본주의’, ‘건강한 자본주의’, ‘의식이 있는 자본주의’, ‘마음이 있는 자본주의’이건  새로운 자본주의의 새 길을 찾는 것이다. 코틀러는 이를 종합해 계몽적이고, 건설적인 자본주의를 제시한다.

과연 이런 자본주의가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명확한 선을 긋는다. 그의 몇몇 해결책은 다분히 급진적인 면도 보여 준다. 아마 한국에서라면 만만치 않은 색깔 논쟁에 휘말렸으리라.

코틀러는 자본주의의 여러 양태를 열어 둔다. 나는 그가 ‘Capitalism’이 아니라 ‘capitalisms’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상식에 기초에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하고, 그 개선점을 설명했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사회가 귀 기울여 볼 대목이 많다. 이 책은 아주 수월하게 자본주의 자체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데, 우리가 자본주의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돌아보게 한다. 자본주의 정말로 간단치 않다.
 

김지환 (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현재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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