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희망농장 취재기 1

생존을 위협하는 길 위의 삶

하루 종일 차 소리, 동네 소리 등 소음에 시달렸다. 먼지와 매연은 공기처럼 함께 했다. 아이들은 수시로 다쳤다. 넘어져서 머리가 깨졌고, 오토바이에 허리를 치였다. 천막과 판자로 된 집안으로 비가 샜다. 그런 날이면 비를 맞으며 추위에 온몸을 떨었다. 우기 때 태풍이라도 오면 밤새 천막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도로에서 질주하는 차를 피해 밥을 지어 먹었다. 화장실은 천막 안에 플라스틱 박스를 놓고 비닐봉지를 씌워 사용했다. 배설물이 차면 비닐을 벗겨 갔다버리는 식이었다. 욕실도 없었다. 여자는 원피스, 남자는 반바지를 입고 길 가에서 씻었다. 위생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피부병에 걸리는 경우도 많았다. 갑자기 형광등이나 날카로운 도구가 떨어지는 일은 다반사였다. 긁히고, 찢어져도 마땅히 치료를 받으러 갈 수도 없었다.

‘언더 더 브리지’(Under the bridge, 다리 밑)에서의 삶은 하루하루가 생존이었다. 천막과 판자는 삶의 터전이 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집이었다.

▲ 언더 더 브리지 지역, 다리 밑에 있는 빈민의 집 ⓒ배선영 기자

2012년 8월에 필리핀 메트로 마닐라 내무부 제스 로브레도(Jesse Robredo) 장관은 나보타스 시를 둘러싼 강의 만성적인 홍수와 태풍의 범람 문제를 해결한다면서 나보타스 시 가꾸기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나보타스 항로의 강을 따라 ‘언더 더 브릿지’에 살던 100여 가구는 온갖 사고와 범죄의 위험에 노출된 것도 모자라 철거의 위협까지 떠안아야 했다. 실제로 정부에서 강제철거를 나와 집을 부쉈지만, 갈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자는 일도 많았다.

2009년부터 필리핀에서 빈민사목을 해오고 있는 김홍락 신부는 “철거정책에 항의하는 의미”로 다리 밑 판자촌에서 빈민들과 함께 2년여를 살았다. 김 신부는 집을 부수러 나온 사람들에게 맞섰고, 나보타스의 시장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빈민촌 생활을 하면서 얻은 병 때문에 현재 11개의 약을 먹고 있다.

부서진 천막을 다시 짓고, 또 부셔지고 다시 집을 세우는 생활을 반복하다가 김 신부는 다리 밑 빈민들에게 안정된 집과 일자리를 마련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희망농장의 시작 그리고 순탄치 않은 여정

김 신부가 필리핀 빈민사목을 위해 만든 단체인 PCM(Pampagalak Catholic Mission)은 빈민들에게 안정된 공간과 일자리를 지원하기 위해 계란과 오리알을 파는 사업을 계획했다. 2013년 3월 나보타스 시에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팜팡가 주 마갈랑 지역의 아라얏(Arayat) 산 중턱에 3000평의 땅을 샀다. 희망농장의 시작이었다.

2013년 4월 양계장을 짓기 시작했다. 계란과 오리알 판매사업을 시작하고 수익이 생기기 시작하면 빈민들을 희망농장으로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그래야 주민들이 자립할 때까지 생활을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4년 1월 나보타스 시는 ‘언더 더 브리지’의 빈민들에게 또 강제철거를 하겠다고 통보했다. 아직 양계장이 지어지기 전이었다. 김홍락 신부는 나보타스 시장과 합의해 3월까지 강제철거를 미뤘다. 양계장 건축은 중단되었고, 빈민들이 살 공간을 먼저 짓기 시작했다.

▲ 희망농장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공간. ㄱ자 형태로 13개의 방이 있다. ⓒ배선영 기자

김 신부는 ‘언더 더 브리지’의 빈민들에게 희망농장에 대해 설명하고 입주 신청을 받았다. 가장 가난하고 자립 의지가 강한 13가구가 희망농장으로 들어왔다. 전보다는 안정되고 안전한 공간에서 살게 됐으나 계획했던 양계장 건축은 계속 연기됐다. 돈이 문제였다. 사업 수익이 생기기도 전에 주민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생활비를 감당하느라 양계장을 지을 예산이 모자랐다.

현재 제1 계사의 양계장 3동이 뼈대는 지어진 상태고, 지붕과 벽을 완성하면 된다. 공사는 아주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자재구입비와 일당을 줄 수 있는 돈이 생길 때, 조금씩 지을 수밖에 없다.

김 신부는 희망농장에 입주한 3월부터 주민들에게 음식, 생활비 그리고 양계장 공사 임금으로 주당 1200페소를 지원했었다. 지난 9월부터는 생활비와 음식을 제공할 수 없게 됐다. 김 신부는 주민들에게 어려운 사정을 설명했고, 희망농장이 아닌 다른 대안을 찾아도 좋다고 말했다. 모든 주민들은 희망농장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희망농장, 빈민들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PCM과 함께 희망농장을 지원하는 한국희망재단으로부터 1200만 원을 후원받아 지난 5일부터 공사는 다시 시작됐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양계장 3동의 건축비와 닭과 오리, 사료 구입비 3000만 원과 제2 계사가 될 7동의 양계장 건축비 7000만 원이 더 필요하다.

▲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양계장의 벽에 시멘트를 바르고 있는 희망농장의 주민 ⓒ배선영 기자

계획대로 되지 않아 절망스러운 순간도 많았다. 그래도 희망은 다시 채워진다.

양계장이 완성되면 계란과 오리알 60만 개를 판 수익금을 주민들이 1/N로 나누고, 그 중 70퍼센트는 가족의 이름으로 은행에 적금을 넣는다. 언제까지나 희망농장에 있는 것은 이들의 자립에 도움이 안 되기에 희망농장에 머물 수 있는 기한은 2년이다. 2년 동안 저축한 돈으로 자신만의 사업을 하거나 PCM이 준비하고 있는 소규모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개업할 수도 있다.

김 신부는 주민들이 희망농장을 떠난 후의 삶까지도 고려하고 있다. 희망농장은 교육이나 현금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빈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자립 모델을 제시한다.

“꼭 잘 될거야!”라고 말하는 김홍락 신부의 표정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그가 희망농장의 주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희망농장이 성장하길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절망의 순간에 스스로를 다독이는 그의 방식이라는 것도 알 것 같다.

그는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 가난한 이들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도와준다면 그들이 얼마나 멋지게 자립할 수 있는지 필리핀 사회에 꼭 보여주고 싶다.

양계장 사업이 시작된다면 2년 뒤에는 새로운 빈민들이 희망농장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계장 사업으로 지금 희망농장에 있는 주민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희망농장은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공동체다. 자립을 넘어 2년 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이 공동체의 꿈이다.

현재 살고 있는 주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안정된 생계를 꾸려나가고, 나아가 이들이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빈민들의 희망이 될 것이다. 

▲ 희망농장 사람들 ⓒ배선영 기자

후원계좌: 한국희망재단 국민은행 375301-04-078449 / 우리은행 1005-702-196730
한국희망재단 홈페이지: http://www.hope365.org/ 전화) 02-365-4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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