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나눈 이야기

(이 글은 11월 16일(일), 얼마 전에 세례를 받은 성심여고 학생들과 미사를 드리며 나눈 이야기다.)

최근까지 아니 실제로는 오늘에도, 가톨릭교회 내에서 평신도들은 매우 수동적으로 지내 왔고, 어느 정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 왔어요. “미사 봤다.” 우리가 흔히 주고받는 이 말에도 이런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기보다는, 옆에서 그냥 바라본다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교회와 달리 우리 사회는 실제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소수 고위 공직자들이 일방적으로 나라를 주도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지역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고민하고 풀어 나가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도 이미 1962-65년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서 교회에서 평신도의 고유한 위상과 역할을 강조했지요. 연중 마지막 주일의 전주를 ‘평신도 주일’로 설정한 배경도 여기에 있겠지요. 사회가 건강하려면, 그 구성원들인 시민들이 깨어 있어야 하고, 사회에 적극적 관심을 보여야 하듯이, 교회가 건강하려면, 그 구성원들인 평신도가 교회에 적극적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을 있는지 반성하고,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지 전망하는 것, 여러분의 책임이자 권리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여성이지요. 평신도의 경우와 비슷하게, 최근까지 아니 실제로는 오늘에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지요. 하지만 이미 여성, 아니 여성성(feminine)을 새롭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요,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 사이에서도. 여성성의 특성으로 흔히 관계 맺기, 주위에 대한 관심, 배려, 보살핌 등을 들곤 하지요. 여성성은 남성 위주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보완해 줄 수 있어요. 예를 들면, 경쟁, 전부 아니면 전무, 승자독식과 같은 살벌한 현실을 따뜻한 기운이 도는 사회로 변화시켜 줄 수 있습니다. 성서도 여성에 대해 이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아내를 누가 얻으리오? 그 가치는 산호보다 높다.”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잠언 31,10.20) 가정에서는 아내, 엄마로서, 지역에서는 좋은 이웃으로서, 사회에서는 남을 배려하는 시민으로서, 그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성심 학생들에게도 기대가 무척 크답니다.

▲ 2013학년도 한 수능 고사장의 모습.(사진 출처=commons.wikimedia.org)

우리 학생들이 사회에서는 여성으로서, 교회에서는 평신도로서 살아가는데, 재능과 능력이 얼마나 많은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잠재된 재능과 능력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서 적극적으로 현실화하는 가예요.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 각자 받은 능력은 다르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가지고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입니다.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세월은 참 빠릅니다. 지금은 고등학생이지만, 여러분 대부분은 이제 곧 대학에 가기 위해 고생을 하겠지요. 대학에 들어가면 앞으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 많은 고민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진입해야 할 기존의 세계, 사회가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여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기서 요구하는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는 원래부터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몸담고 살아야 할 사회 현실을 잘 살펴보세요. 어떤 것들은 여러분들이 힘들어도 열심히 준비해서 잘 살아내야 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야, 이건 정말 아닌데.” 하는 것들도 있을 거예요. 우선 모든 것이 대학교 입시를 목표로 맞춰진 우리의 교육현실을 보세요. 거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이른바 ‘비정규직’, ‘하청’ ‘파견’ 등 열악하고 불안정한 신분으로 일해야 하는 우리의 노동 현실을 보세요. ‘구조조정’, ‘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회사에서 사람들을 마구 쫓아내는 걸 보세요. 높은 자살률을 보세요. 이런 현실을 보면 우리 사회가 사람을 근본으로 여기는 사회라고 말할 수 없지요.

하지만 세상이 원래부터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소위 머리와 힘이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성서는 창조주 하느님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말하지만, 오늘의 현실에서는 돈이 주인이 되었지요. 그런 일은 성서 시대에도 있었지요. 그래서 거듭 경고를 합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돈이 주인이 되면, 사람은 결국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이런 현실은 우리가 적응해서 살아내야 할 것들이 결코 아니랍니다. 이런 현실은 여러분들이 힘을 합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이에요. 사람다운 세상, 따뜻한 피가 도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분은 주어진 현실에 들어가야 하지만, 또한 이 현실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아무리 강고해 보이는 현실도 결국은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그렇게 하려면, 최소한 이런 상황에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There is no alternative!” 1980년대, 가능한 모든 것을 시장 원리에 맡기는 현재의 세상을 만드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던 영국의 총리, 마가렛 대처의 말입니다. 이 길 외에는 다른 길, 대안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넘어가면 우리는 현실이 아무리 문제가 많더라도, 비인간적이라도 감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부터 그런 것이니, 어떻게 하겠어요. 하지만 이 말은 거짓입니다. 세상의 모든 현실은 우리 인간들의 작품입니다. 지배적인 현실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현실이 바람직한 것인가?” “나는 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최선의 삶을 살 것인가?” 언제나 고민해야 합니다. 혼자서는 너무 힘들어 포기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눈을 옆으로 돌리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발견할 거예요. 함께 고민하면, 꿈이 현실이 됩니다. 함께 걸어가면 길이 생긴다고 하지요? 아무쪼록 이 꿈을 현실로 만드는데, 없는 길을 내는데, 우리사회의 당당한 시민들인 우리 성심학생들, 여성으로서 평신도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한껏 발휘하세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신의 삶을 정말 아름답게, 의미 있게 가꾸어나가길 바라요.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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