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둠과 빛, 절망과 희망
대림 시기, 우리는 하느님의 육화의 신비를 기억하며, 설렘과 희망으로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고 준비해 왔습니다. 성탄, 연말이기도 합니다. 한 해를 돌아봅니다. 유독, 어둡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너무나 참담하고 어처구니없는 세월호참사, 진상 조사는 아직 시작도 못한 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대학에는 취업 한파가 여전합니다. 졸업이 두렵다는 학생들이 늘어납니다. 이제 ‘취업준비생’이라며 애써 웃는 얼굴을 보기가 안쓰럽습니다. 웃음 뒤에 있는 걱정과 두려움이 읽힙니다. 한 겨울, 길거리에는 내몰린 사람들이 넘쳐 납니다. 혹한 속, 맨몸으로 공장의 굴뚝에, 시내의 전광판에 올라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는 것 빼고는 해보지 않은 것”이 없는 해고노동자들입니다. 독해서가 아닙니다. 살고 싶은데,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해서가 아니라,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얘기를 들어 주지도 않는 현실 때문입니다. 사실은 울고 있는 겁니다. 아파 죽겠다고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는 겁니다. 독한 것은, 사람들을 이 지경까지 내모는 우리의 현실, 우리의 시절입니다.

그렇게 보면, 올 한해는 빛보다 어둠이 훨씬 짙은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절망에 비례해, 성탄을 맞는 우리의 희망도 더 간절해집니다. 우리의 설렘은 더 강해집니다. 우리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길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절망하는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강생과 성탄은 깊은 위안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2. 아기: 어둠과 암흑 속을 비추는 빛, 성탄
아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방식,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는 방식입니다. 빛으로 우리에게 온 갓난아기, 아직 핏덩이인 채 구유에 뉘여 있습니다. 아기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철저한 무력함이 거기 있습니다. 보십시오!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주, 무력한 아기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아기의 운명은 전적으로 부모의 손에 달렸고, 사람들의 손길에 내맡겨졌습니다. 하느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신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사랑은 나의 관심을 내가 아니라 끊임없이 ‘너’에게 향하게 합니다. ‘나’를 기꺼이 포기하고 ‘너’와 하나가 되도록 합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이심을 포기하고, 세상 속으로 기꺼이 들어오신 연유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케노시스(κένωσις), 자기 비움입니다.(필리 2,7 참조)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헌데, 왜 하필 ‘아기’로 오셨을까? 아기를 보면, 우리는 관심을 아기로 돌리게 됩니다. 아기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자신의 무력함으로 우리에게 호소합니다.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 이제는 아기가 되어 우리의 관심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기를 통해 우리를 기다리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향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의 역동성입니다. 아기로 인해, 우리는 사랑을 배웁니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자라납니다. 그렇게, 우리는 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고,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를 채우면 채울수록 더 공허해진다. 나를 비우면 비울수록 더 충만해진다.” 사람은 그런 역설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이고,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비우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위하여.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히 되어야 할 존재, 더욱 ‘사람’이 되도록 아기로 오신 것입니다.

3. 지금 여기, 우리 앞에 놓인 아기들
하느님은 오늘도 여전히 무력한 존재로 다가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우리가 고개를 들고, 자신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눈을 돌리도록 호소합니다. 순식간에 바다 속에 갇혀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나야했던 세월호참사의 희생자들, 우리 앞에 놓인 아기들입니다. 수학여행의 들뜬 마음으로 배에 올랐던 학생들, 우리 앞에 놓인 아기들입니다.

하지만 아기에 대해 모두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슬퍼하며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무관심, 심지어 냉대와 적의도 눈에 띕니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자기 이익의 추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자기 앞에 튀어나온 아기는 안락함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이천 년 전, 아기 예수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상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머물 곳도 없이 객지에서 해산을 하게 된 난감한 처지에 빠진 마리아와 요셉 부부에게 마구간을 내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반면,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자,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아이들의 살육도 서슴지 않았던 당시의 권력자 헤로데 왕도 있습니다.

경쟁과 효율만이 일방적으로 강조되는 세상에서, 한번 낙오하면 끝장이라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해, 외딴 섬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 서로 관심의 손길이 필요한 존재들이지만, 서로 고립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고, 우는 능력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지난 여름 시복식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 사회는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되었습니다.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이야기, 너무나 흔한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극도의 풍요를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극도의 가난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부자의 문 앞에 있었지만, 라자로는 부자에게 ‘없는’ 존재였습니다. 세상에서 완전히 배제당한 존재, 거지 라자로입니다. 힘없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쉽게 배제될 정도로 무관심이 우리 사이에 만연해 있습니다. “무관심의 세계화”,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여, 라자로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너무나 쉽게, 사람들을 밖으로 밀어내 버립니다. 밀려난 이들의 신음과 울음이 그치지 않지만, 세상은 무심히도 흘러갑니다. 많은 우리들, 이번에는 내 차례가 아니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자신에게 몰두합니다. 다음에도 내 차례가 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불안과 두려움이 내 삶을,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갑니다. 우리의 슬픈 모습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외딴 섬과 섬을 이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어릴 때에 우리 모두가 부모의 관심을 먹고 자라듯이. 인간은 원래가 그런 존재입니다. 지난 10월, 세례 준비 피정을 하던 성심여고 여학생들과 2시간 정도를 함께 보낸 적이 있습니다. 세례 후에, 아이들을 공동체로 초대해 미사를 하고 점심을 같이 먹었습니다. 아이들이 제게 손편지를 써 왔습니다. 뜻밖의 선물에 참 기뻤습니다. 헌데, 더 놀랍게, 성금을 모아서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가장 필요한 곳에 쓰라면서. 얼마 후, 우리 학교 여학생이 하나 찾아왔습니다. 몇 년 전, 캄보디아의 예수회 장애인 기술학교에서 네 달 정도 일했는데, 그 후론 소식이 좀 뜸했었습니다. 만나서 제게 내민 손편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캄보디아에서의 약 100일, 시간이 흐를수록 제 삶에서 매우 중요한 빛이 되어갑니다.... 제 삶에 커다란 선물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편지와 함께, 꼭 필요한 곳에 써 달라며,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한동안 돈에 담긴 학생들의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며, 학생들의 성금을 씨앗으로, 여기 저기 부탁해 돈을 더 모았습니다. 사연과 함께 성금을,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 생각한 세 곳에 전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알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학생들은 아직은 낯선, 그래서 조금은 두려운 세상, 하지만 자신들도 곧 몸담아야 할 세상의 이웃들과 연결되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외딴 섬과 섬이 이어졌습니다.

4. 강생과 성탄: 하느님의 연대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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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섬과 섬을 이으려는 마음과 행위, 우리는 이를 ‘연대’라 부릅니다. 연대는 하느님이 먼저 우리들에게 손을 내밀며 시작된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강생과 성탄, 바로 연대의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강생,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손을 내민 연대의 사건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당신의 손을 잡아 달라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미는 연대의 사건입니다. 마리아가 응답했고, 요셉이 응답했습니다. 마구간 주인이 응답했습니다. 연대의 손길로 자라난 예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며 먹고 마셨습니다. 이렇게 연대는 또 다른 연대를 낳습니다. 이렇게 연대는 세상의 수많은 외딴 섬들을 연결하는 손길입니다.

연대의 마음은 단순한 동정심과는 다릅니다. 연대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다른 이에 대한 근본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연대는, 하느님의 육화와 아기 예수의 성탄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다른 이에 대한 근본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연대는 신앙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삶의 근본 태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연대를 호소합니다. 그래서 연대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입니다. 연대 앞에서 무관심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셨듯이, 연대의 세계화로 무관심의 세계화를 극복해야 합니다.

연대함으로써, 우리는 변화됩니다. 연대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신앙의 신비, 하느님의 마음을 조금은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연대함으로써, 우리는 타자에 대한 살아 있는 감각을 키웁니다. 연대를 통해 익명의 해고노동자가 얼굴을 지닌 나의 이웃으로, ‘누구’로 살아서 다가옵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6년째 부당한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평택공장에서 평택법원까지 매일 3보1배를 할 때, 그리고 지난 11월, 대법원 앞에서 공정한 판결을 호소하며 매일 2000배를 할 때, 잡아 달라 내미는 손을 보았습니다. 맞잡았습니다. 기륭전자 해고노동자들, 10년째 비정규직에 대한 부당한 해고 철회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비정규직법제도 전면 폐지를 요구하며 서울 거리에서 오체투지를 시작했을 때, 잡아 달라 내미는 손을 보았습니다. 맞잡았습니다.

이렇게 한 연대의 시간이 함께 하는 우리 모두를 변화시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 “우리 모두가 한 형제자매”라는 말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습니다. 말에 살이 붙고, 피가 돕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이어 줍니다. 찾아가서 함께 하면, 심지어 말 없는 자연도 파헤쳐지고 잘려 나간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며 말을 걸어옵니다. 지난여름 24일간, 부산 고리 핵발전소에서 대전의 유성까지 탈핵 도보순례를 하며 자주 느꼈던 것입니다.

연대함으로써, 우리가 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 타자를 바라보는 시각, 타자에게 다가가는 방식, 타자에게 행동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연대를 통해 외딴 섬과 섬들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이 달라집니다. 아니, 연대함으로써 변화된 우리가 세상을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 가는 것입니다.

올 한해, 안식년을 지내는 동안, 가능한 잡아 달라 내미는 손이 있는 곳, 저를 끌어당기는 곳으로 가려 했습니다. 찾아가서 함께 하며, 그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함께, 더러는 홀로, 울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내가 더 사람이 되었음을 느낍니다. 그런 뜻에서 제게는 참으로 고마운 한 해였습니다.

곧 새해입니다. 우리 모두 주위를 더 둘러보고, 다른 이들에게 더 관심을 쏟았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손 내미는 사람들,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가서 함께 했으면 합니다. 이것은 특히 얼마 후 세상에 나가야 하는 우리 젊은 학생들, 또는 갓 사회인이 된 우리 젊은이들에게 꼭 필요한 의식과 깨달음입니다. 살기가 힘들다 합니다. 그럴수록, 외딴 섬들을 잇겠다는 마음이 더 절실해집니다. 그렇게 손을 내밀면, 언젠가 필요할 때, 누군가 내게도 손 내밀어 줄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던 하느님, 이제 우리의 손을 통해 또 다른 우리들에게 손을 내밀 것입니다.

함께 더 깊이 공감하고, 힘들면 함께 울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 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 사랑이신 하느님을 더, 닮아갔으면 합니다. 사람 같은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좀 더 따뜻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웃었으면 합니다.

성탄, 언제나 말없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아기 예수, 새해에도 변함없이 우리를 사람의 길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지배하는 그런 삶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초대에 기꺼이 응답할 때, 우리는 성탄의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런 마음 가득 모아, 성탄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했으면 합니다.

“진심으로 성탄을 축하합니다.”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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