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호흡처럼, 이 노래처럼]

함께 살아가다 보면 ‘소통’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오해와 상처가 생기며 관계가 악화되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처를 입기가 쉬운데 그건 상대방에게 보다 더 마음을 주고, 더 기대하고, 소통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아끼는 후배와 사소한 오해와 섭섭함이 있었는데 그걸 빨리 풀지 못하다 보니 서로 소원해지고 우리가 언제 가까웠나 싶을 만큼의 거리가 생긴 것이다.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기회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 마음은 있지만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 웃으며 손을 잡았을 때 우리 사이에 잠시 막혔던 통로가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에 컴백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있는 지오디의 신곡 중 ‘우리 사는 이야기’라는 곡을 들었을 때, 정확히 말하면 뮤직비디오를 봤을 때, 노랫말과 영상에 담긴 내용이 다가왔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이 노랫말과 영상은 소통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http://www.youtube.com/watch?v=oi4ZJea75FI

<우리가 사는 이야기>

남의 편 같은 남편과 가슴에 식어가는 아내
바늘같이 예민한 아들 아주 삐딱한 우리 막내딸

사랑한단 말 고맙다는 말 가슴 한 켠에 묻어둔 채 살다가
이제서야 늦었지만 숨기지 않고 말할게

소중한 사람 지켜 줄 그 사랑 내 옆에 늘 같은 자리에 있단 걸
몰랐었던 바보 같던 우리가 사는 이야기

남을 위한 기도는 곧 나를 위한 기도 혹시 알면서도 우린 외면했는지도
사람이 사람 같지가 않아 사랑이 사랑 같지도 않아

사랑한단 말 고맙다는 말 가슴 한 켠에 묻어둔 채 살다가
이제서야 늦었지만 숨기지 않고 말할게

소중한 사람 지켜 줄 그 사랑 내 옆에 늘 같은 자리에 있단 걸
몰랐었던 바보 같던 우리가 사는 이야기


작은 오해와 섭섭함이 벽을 만들고 거리감을 주고 소통을 어렵게 한다. 그러다 보면 작은 일에도 예민하고 믿지 못하고 자신을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서로를 이해하고 이야기 나눌 어떤 기회가 필요하다. 마음을 열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라고 하셨던 선배 수녀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도 있고, 아주 작은 하나의 상황 때문에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고, 어려워진 관계 때문에 중요한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아픔은 이렇게 작은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남의 편 같은 남편도, 가슴이 식어가는 아내도, 바늘같이 예민한 아들도, 삐딱한 막내딸도 사실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에 가슴에 감춰 둔 뾰쪽한 바늘들이 모두 녹아버리는 ‘나’와 같은 존재인 것을 자주 잊어버린다. 그러기에 외면하게 되고 먼저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들이며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 받았다. 그러기에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넘어설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 안에 갇혀 있을 때가 많은 것이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2-3)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떠올리며 오늘 나부터 자신을 열고 소통과 사랑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하게 된다.
 

황난영 수녀 (율리아나)
성 바오로 딸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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