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교 신부] 10월 19일 (전교 주일) 마태 28,16-20

내일(10월 16일)이면 6개월이 됩니다. 기억하자, 20140416이 새겨 있는 고무 밴드를 팔에 걸치고 다닙니다. 클러지 셔츠의 왼쪽 가슴에는 노란 리본이 달려 있습니다. 지난 6개월의 시간 동안 제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너무 자주 목격해서일까요? 그래서 새누리당의 어떤 국회의원의 말처럼,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교통사고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힘을 가진 자들의 승리가 예측되는 오늘을 지내면서 다시 한 번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정상인가, 그리고 이런 나라가 나라인가?”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힘을 강제하는 통치조직이 된 나라가 정상일 수 없다.”

대통령에 대한 모독은 국민에 대한 모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언비어를 단속하고 처벌하기 위해서 광범위한 사찰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이버 망명이라는 부끄러운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나라에서 정상의 범주가 무엇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사라진 7시간의 행적을 밝히라는 요구가 대통령에게 모독이 되는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법과 원칙에 따른 공정한 법 집행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법 집행의 공정함이 누구에 대한 공정함인지 밝히지는 않습니다.

나만 아니면 돼

진리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부에 대한 권리 앞에서 진리는 힘을 잃어버립니다. 20대 80의 사회를 넘어서 10대 90의 사회로 변해갑니다. 소유의 권리가 진리를 무력화시키는 사회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죽어 갑니다. 초등학생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전에는 뉴스에 큰 충격과 함께 보도되었던 아이들의 죽음이 이제는 너무 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내 아이만 아니면 됩니다. 학업과 친구, 가정에서의 문제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아이들을 목격하면서 우리 사회는 그 죽음을 하나의 사건 혹은 사고로 바라봅니다.

전교 주일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지내기가 힘들게 느껴집니다. 전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서 전해야 하는 예수를 살아 내기가 힘듭니다. 교황님의 사목방문의 영향으로, 성지가 호황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전교의 좋은 기회가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교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자 수를 배가해서 한국사회 안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교회의 힘을 발산하는 것이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전교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예수살이”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산 위에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새겨 놓으신 발자국이 사실인지 아닌지 관심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해 주신 말씀에 집중합니다.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제자는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파견의 목적은 가르침을 지키게 하는 것, 곧 삶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세례가 목적이 아닙니다. 세례는 살게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리고 파견된 사람은 제자이어야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의 나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파견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자됨의 길을 걷는 사람이, 백성들을 제자로 삼아서 세례를 주고 가르침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동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교는 다스림이 아니라 동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예수살이”의 길을 동반하는 것이 전교입니다.

▲ 교황 방한 기간 중 8월 17일 아침, 세월호 유가족 이호진 씨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세례를 받고 있다. ⓒ교황방한위원회

나무를 베어 내고 그 자리에 잔디를 심습니다. 조그만 구멍을 뚫고 깃발을 세워 놓습니다. 긴 작대기 끝에 스푼을 달아 놓은 채로 공을 쳐서 날립니다. 일부의 사람들만이 출입 가능한 구역입니다. 그곳에서 길게 뻗어 있는 잔디밭 위로 날아가는 공을 보면서 외칩니다. “굿샷!”
그리고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망각이라는 어둠속에 묻어버립니다.

비싼 옷을 걸치고 노동을 하지 않은 고운 손을 내밉니다. 자리에 가면 윗자리를 찾습니다. 기름진 음식과 비싼 술을 먹으면서 자신을 초대해 준 사람들과 덕담을 나눕니다. 배에 기름기가 채워질수록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줄어듭니다.

전교란 무엇인가?

학술적인 정의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전교를 말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점점 더 비인간적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명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지금, 교회가 언급하는 전교는 과연 가능할까?

교황님께서는 전교는 매혹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하셨습니다. 성적인 매력이 아닙니다. 삶이 드러내는 매혹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드러내는 매혹이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통치조직으로 전락한 나라, 진리가 소유의 권리에 굴복하는 나라, 아이들의 죽음과 노동자들에 대한 폭행이 일상화된 나라, 돈이 정의를 이기는 나라 안에서 교회가 드러내야 하는 매혹은 무엇이고, 매혹을 드러내기 위한 구체적 장소는 어디일까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곳이 헤로데가 머물던 왕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름진 음식과 술 그리고 음악을 들으면서, 종들의 시중을 받는 왕궁은 아닙니다. 그런데 왕궁으로 가고 싶어집니다. 마치 제가 왕궁에 들어가 시중을 받을 자격을 갖추기나 한 것처럼 말입니다.

외로움, 어쩌면 이런 시대 안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봅니다.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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