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루카 9,23-26

‘짐이 국가다.’

미쳐가는 사람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니 이미 미친 것인지도 모릅니다. 무엇에 미쳤을까. 권력과 자본에 미쳤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녀에게 가난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녀에게 국민이라는 무지렁이들이 흘리는 눈물이 한 편의 연극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스스로를 자칭 배우라는 국회의원들의 욕지거리 한 판이 벌어진 ‘환생경제’라는 연극을 보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던 관객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사람의 삶이 참 고달픕니다.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토록 힘들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라는 행성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시니 좋았다”라고 감탄하시던 하느님의 작품인 지구, 모든 생명체가 각기 고유한 경계선을 지키며 번성하고 풍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창조된 지구, ‘손에 손잡고’를 부르며 감탄하던 사람들이 존재하던 지구, 이런 지구라는 행성 안에 살아가면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행복이 보이지 않습니다. 행복보다 슬픔과 고통이 더 느껴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실이 참 고달프고 힘듭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고달프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현대인들, 이 사람들이 지고 있는 것이 정말 십자가일까?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자랑스러운 신앙의 역사를 기억하고 축하하는 시간임에도 마음은 더 무겁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역설적이게도 8월에 있었던 교종의 한국 방문과 시복식 때문이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뜨거움과 환희 그리고 다짐. 교회가 걸어야 하는 길에 대한 명확한 제시와 반성, 변화와 혁신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교회 넘어 교회를 살아야 한다는 교종의 가르침은 깊은 울림을 주었고, ‘일어나라’고 외치는 교종의 모습에서 다시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보아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순간의 꿈이었나 봅니다.

움켜잡은 손은 펴지질 않고 안쪽으로 굽은 팔은 밖으로 뻗을 수 없습니다. 하늘을 보아야 하는 눈은 다시 권력과 돈이 있는 곳을 향합니다. 너무나 빨리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거친 음식과 옷 대신에 기름진 음식과 화려한 예복을 애써 찾고 “사람아, 사람아, 네 이웃은 어디에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귀마개를 찾습니다.

화려하게 재탄생하는 명동을 보면서 짙은 화장을 하고 몸을 파는 여인이 떠오릅니다. 도시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지는 건물더미 속에서 파놉티콘이 보입니다. 통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도로를 넓힌다는 이유로 산과 논과 밭을 깨뜨리는 모습에서 절벽으로 맹렬하게 돌진하는 술 취한 운전사의 퀭한 눈이 보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에 의문이 듭니다. 자신을 버리면서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자신이 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십자가는 없습니다.

ⓒ김용길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자신을 버려야 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자신은 자신으로 위장한 거짓 자아입니다. 아른바 꾸며낸 자아,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자아입니다. 역할 중심의 자아이기도 하고 드러냄을 위한 자아이기도 합니다. 이런 거짓 자아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자부심과 자긍심, 혹은 수치심, 분노, 기쁨, 슬픔, 웃음 ……. 그런데 거짓 자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결과는 동일합니다. “위선과 거짓 그리고 관계의 파괴”

거짓 자아로 자신을 위장하면 세상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힘을 지닐 수도 있습니다. 힘과 돈으로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더 많은 향락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곳간을 가득 채우고 먹지 못해서 허리가 굽은 사람들을 향해서 실패자라고 손가락질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식 잃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부모들에게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애써 짓는 이유는 그의 인간됨을 향한 존경이 아닙니다. 시궁창 냄새가 나면 얼굴을 찌푸리게 됩니다. 화려하게 입고 기름진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냄새는 가려지지 않습니다.

세상을 얻었지만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지도층이 아니라 지배층입니다. 그들은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존엄을 거짓 자아에 팔아넘겼습니다. 사실 그들이 지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의로움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불의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는 십자가를 지고 있을까?

요즘 자주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이 떠오르면, 오늘 교회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안타까움과 희망이 교차됩니다. 한 지역에서 살고 있는 저도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나는 진실로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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