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은 '천사'가 아니다

4월 16일 ‘그날’ 이후,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 대한민국이 달라져야 한다’고들 한다. ‘프란치스코 신드롬’이라할 만큼 온 나라를 4박5일간 감동으로 열병 앓게 했던 교황 방한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 역시 교황 방문 이전과 이후로 달라져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교황이 방문했던 꽃동네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한국가톨릭교회에 대한 교황의 주문이 ‘번영의 유혹에 빠져 있는 중산층 교회에서 탈피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중심이 되는 가난한 교회를 지향하라’는 것이었다면, 꽃동네에 대한 교황의 주문은 ‘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자선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인간화시키라’는 것이었다.

꽃동네를 향한 교황의 ‘돌직구’, “자선사업에서 나아가 인간 성장을 도모하라”

특이하게도 청주교구 교황방문준비위원회 홍보부장 이현로 신부가 미리 언급한 것처럼 교황은 꽃동네 장애인을 만날 때 말이 아닌 행동만 하였다. 이 표현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온전히 짚어낼 수 있을까. 왜 꽃동네 ‘시설 방문’ 때만 교황 연설이 없었는지, 그 후 (같은 꽃동네 구내에서 있었던) 평신도와 수도자 모임에서야 간접적으로나마 꽃동네 문제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내막이 밝혀져야 할 것 같다.

교황은 평신도사도직 단체와의 만남에서 “가난한 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일에 직접 참여하는 활동을 반드시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자선 사업으로 충분하지는 않으며, 인간 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면서 “모든 사람이 저마다 품위 있게 일용할 양식을 얻고 자기 가정을 돌보는 기쁨을 누리게 되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수도자들과의 만남에서도 “여러분의 주의를 흩어버릴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추문과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면서 “청빈 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친다”며 “순전히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 보라. 이는 우리의 희망을 인간적인 수단에만 두도록 이끌며 청빈의 증거를 파괴한다”고 경고하였다.

지난 6월에 사전 방한한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사무총장 토소 주교를 내가 직접 만나 교황께 전한 “꽃동네에서 ‘수용 장애인의 사회통합에 오웅진 신부가 나서라’는 강론을 해달라”는 부탁이 받아들여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시대착오적이고 비인간적인 장애인 수용시설에다 갖은 추문과 의혹에 시달리고 있는 꽃동네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고 옳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돌직구’가 아닐 수 없다.

찾아온 장애인을 문전박대한 꽃동네, 수용 장애인은 천사로 만들어 교황 ‘알현’

사실 교황 방문지 중 유일하게 논란을 부른 곳이 꽃동네였다. 장애인 단체들은 꽃동네가 장애인의 자립생활 의지를 북돋는 대신 지역사회와 격리시키는 대규모 수용시설이라는 점을 들어 교황의 꽃동네 방문을 결사반대하였다. 꽃동네 역시 교황 방문 당일 꽃동네를 찾아 온 충북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들을 경찰을 동원해 진압하고 격리 추방시켰다. 이런 대응이야말로 오웅진 신부식 장애인복지 그 표리부동함을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심지어 교황방한준비위원회 위원장 강우일 주교를 면담해 교황의 꽃동네 방문 반대 의사를 전하려고 명동성당을 방문한 장애인들을 명동성당측은 경찰을 불러 진압하면서 일부 인사는 “거룩한 명동성당을 더럽히지 마라. 오늘의 잘못을 용서받고 회개하라”고 질타하였다.

▲ 지난 8월 16일, 충북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들이 음성 꽃동네 교황 방문 행사장에 들어가려다 사제와 경찰들로부터 제지 당하고 있다. ⓒ송상호

이렇게 장애인들을 문전박대한 꽃동네가 수용 장애인들은 천사로 만들어 교황을 ‘알현’시켰는데, 미국에서 시작된 장애인 자립생활운동에서 내세우는 제1 원칙이 ‘장애인은 천사가 아니다’이다. 마초가 여성을 순결한 천사로 드높이고, 인종차별주의자가 아프리카 흑인을 순박한 천사로 내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까닭이다. 엄연한 인간으로서 갖은 욕망을 지닌 장애인과 여성과 흑인을 굳이 왜 천사로 만들려는가. 여성과 흑인이 그러하듯 장애인 역시 천사가 아닌 인간다운 인간이길 바라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꽃동네 오웅진 신부가 ‘모신다’는 장애인은 어떤 장애인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하면서, 그의 장애 감수성을 가늠하게 만들었다. 한국가톨릭 장애인복지사업의 얼굴이라는 오웅진 신부의 민낯이 드러나는 뼈아픈 순간이자, 갈수록 오웅진 신부 개인의 사유화된 복지권력으로 치닫고 있는 꽃동네 개혁 그 필요성을 더욱 절감한 순간이기도 하였다.

사실 가톨릭 사회복지 시설들은 대체적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 그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 잡으면 소위 창립자는 뒤로 물러나고 시설 자체를 교회에 헌납하고 관리와 운영도 맡긴다. 사제라는 신분 자체가 소유에서 자유롭고, 그 ‘사업’조차 교회를 위한 것이라 여기는 까닭이다. 사업이 성공한 데엔 교회의 이름 그 도움(인적 물적 후원)이 컸다고 보기에도 그러하다. 그런데 유독 꽃동네만 교회세습을 꿈꾸는 개신교 대형교회들처럼 오웅진 신부 사유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다. 꽃동네 비리 문제가 늘 오 신부 개인과 오버랩 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엔 꽃동네 전체에 치명적인 화를 초래하고 말 불행의 씨앗이 아닐 수 없다.

‘달라진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게 만드는 ‘도로묵’ 행태들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들은 ‘달라진 나라’를 기대했었다. ‘세월호 이전과 세월호 이후는 분명히 달라진 나라를 만들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을 믿어서이기도 했고, 참사 앞에서 사회 전반에 일어났던 국민적 각성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가족이 대통령을 만나려면 초인적인 단식에다 청와대 앞에서 노숙부터 해야 하는 현실, 진상 규명 위해 ‘제대로 된 특별법’을 요구하는 국민적 요구에 ‘세월호 피로감’ 운운하며 ‘제멋대로 특별법’을 제시하는 무능하고 철면피한 여야 정치권, 이런 기만적인 ‘도로묵’ 행태들 앞에 국민들은 ‘달라진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어느덧 내려놓고 있다.

교황 방한을 계기로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한국 가톨릭교회 쇄신도 그러하다. 방한 이전에 교황청에서 이미 염려했듯이, 교황이 남기고 간 메시지와 ‘낮은 데로 향하는’ 실천적 행동 그 의미는 잊어버리고, 교황 방한을 4박5일짜리 이벤트 정도로만 여기며 추억하고자 한다면 교회 쇄신에 대한 꿈 역시 ‘도로묵’이 될 가능성이 높다.

꽃동네 같은 시대착오적인 대규모 장애인 수용시설 역할 끝났다

꽃동네 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꽃동네 ‘장애인 천사들’ 이마에 교황이 입을 맞추고 껴안아준 것만을 감동의 순간으로 기억할 것이 아니라, 교황의 ‘자선사업에 그쳐서는 안 되며 인간 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으로 이어져 모든 사람이 저마다 품위 있게 일용할 양식을 얻고 자기 가정을 돌보는 기쁨을 누리게 되어야 한다’는 간절한 주문을 주의 깊게 듣고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갈수록 장애인 복지시설 자체가 소규모화 되고 지역사회 친화적으로 변하는 추세에서 꽃동네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대규모 장애인 수용시설의 역할은 끝났다고 봐야한다.

나는 꽃동네가 장애인복지사업에서 손을 떼고 그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을 노인복지사업에로 전환하라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었다. 그렇지만 오웅진 신부가 꽃동네를 통해 장애인복지를 하고자 한다면, 교황의 주문대로 장애인 자립과 사회통합을 꾀하는 장애인운동에 인적, 물적 자원을 동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조언하고자 한다. 이것은 교황 방문을 반대했던 장애인들이 꽃동네에 선의의 마음으로 보내는 ‘마지막 권고’다. 만일 꽃동네가 18세기형 강제수용소 방식의 장애인사업을 계속 고집한다면 장애인 시설 폐쇄를 외치는 장애인들과 생사를 건 싸움을 해야 하는 불행한 사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꽃동네 방식에 머물고 있는 장애인복지사업 근본개혁 시작해야

더 나아가 아직도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는 꽃동네 방식에 머물고 있는 한국 가톨릭교회 장애인복지사업의 근본적인 개혁을 시작할 때다. 지난 80~90년대 이후 ‘보조금의 맛’에 길들인 이후 본말전도 상황에까지 처하며 잃어버렸던 초심, 인간존엄의 하느님 사랑 그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사회통합을 지향하는 예수의 복지정신에도 어긋나는 수용시설 위주의 반(反)예수적 장애인복지사업에서 벗어나, 교황이 누누이 강조하듯이 그들의 사회통합에 복지 자원을 써야할 것이다.

정부의 장애인복지 정책 방향 역시 수용시설에 주는 예산을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자립생활 인프라 구축에 예산을 돌리는 정책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선진국은 이미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복지예산 절감 효과도 거두고 있다. 꽃동네를 비롯한 수용시설에서 ‘탈출’하려는 장애인들의 탈시설 움직임을 말리는 상투적 핑계가 ‘열악한 복지 현실’인데, OECD국가에다 언필칭 ‘복지사회’를 표방하는 정부의 책임 방기가 아닐 수 없다. 박근혜 정부의 5대 국정목표인 ▲일자리 중심의 창조경제 ▲맞춤형 고용ㆍ복지 ▲창의교육과 문화가 있는 삶 ▲안전과 통합의 사회 ▲행복한 통일시대의 기반구축 등은 이런 장애인복지 선진화와도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장애인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교황의 꽃동네 방문이 이런 의미있는 결과를 낳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프란치스코 신드롬’이 낳은 교황 방한 이후의 가장 소중한 결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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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대구대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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