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파적으로 브라질 월드컵 축구 경기를 잠깐 둘러보고 나오곤 한다. 예선전보다는 8강, 4강으로 갈수록 축구의 진수를 맛보는 느낌이 어쩔 수 없다. 국내에선 벨기에에 패하고 일찌감치 귀국한 한국 대표 선수단과 관련해 홍명보 감독의 유임 문제 때문에 뒤끝이 작렬한다.

축구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다. 6월 29일 새벽 1시 브라질 벨루오리존치의 미네이랑 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과 칠레 16강전에서 경기 시작 전에 보고 들은 ‘국가 연주’가 더 압권이었기 때문이다. 선수들뿐 아니라 관중석에서도 격하게 노래를 불렀다.

“Ouviram do Ipiranga as margens plácidas”로 시작되는 브라질 국가(Hino Nacional Brasileiro)는 자유와 평등의 염원으로 이룬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평온한 이피랑가의 둑에 영웅들의 함성이 들린다.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눈부신 자유의 빛 나의 조국의 하늘에 한 줄기 비추네. 힘센 팔로 이루었네, 우리의 평등의 염원을. 그대의 가슴에 자유를! 우리의 심장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리! 오, 사랑하고 경배하는 조국 만세, 만세!”

브라질이 해방신학의 산실이 되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회가 있는 까닭을 알 수 있겠다. 이 곡은 작곡가 겸 음악교사였던 프란시스쿠 마누에우 다 시우바가 작곡하였고, 가사 없이 연주되다가 우여곡절 끝에 독립 100주년을 맞이한 1922년에야 두키이스트라다가 지은 가사를 붙여 공식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칠레의 국가인 ‘칠레 찬가’(Himno Nacional de Chile)는 에우세비오 리오와 라몬 카르니세르 가 처음 작사, 작곡했는데, 원래 노랫말이 6절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5절만 후렴구와 함께 불린다. “참으로 칠레여, 그대 하늘은 푸르고(Puro Chile, es tu cielo azulado)”로 시작되는 이 찬가는 거듭되는 후렴구가 장엄하다. “조국이여, 이 맹세를 받아주오. 제단 앞에서 칠레는 이렇게 선언했느니, 자유인의 무덤이 되리라! 아니면 억압받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리라”에서 뒷부분의 두 소절을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른다. 이 나라가 무엇을 위한 어떤 나라인지 이 찬가만 불러도 저절로 알게 된다.

축구 경기를 보려다가 텔레비전 화면으로 브라질과 칠레 선수들이 목청을 돋우어 국가를 부르는데, 아래에 흐르는 자막을 읽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부러웠다. 백성들의 열망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찾아보니, 그 나라 국가의 배경으로 평범해 보이는 수많은 민중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 지난 5월 28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하나은행 초청 축구국가대표팀 친선경기에 앞서 한국 선수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아주경제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국가에 지친 국민은 애국가 부를 기력도 없어

이내 떠오른 것은 ‘애국가’다. 태극기가 우주적이라 그런지, 우리나라 ‘애국가’ 역시 너무 추상적이라서 별 감흥이 없다. 유신 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국기게양식마다 길에 서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강요받으며 들었던 애국가는 내게 무슨 의미일지 생각한다.

그 시절 외웠던 ‘국기에 대한 맹세’는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였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7년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로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는 마찬가지다. 세월호 사건으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의심하는 국민들 입장에서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국가주의’적 발상이다.

애국가도 마찬가지다. 동해물과 백두산, 남산의 소나무, 가을 하늘과 밝은 달을 노래하면서 결국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자고 부추긴다. 국가에 대한 ‘충성’의 콘셉트는 있지만, 백성의 고통과 슬픔, 기쁨과 희망, 국민들의 해방을 향한 연대감 같은 것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세월호 참사에 대처하던 국가의 안일한 태도가 고스란히 애국가에 담겨있는 것 같다.

국가는 ‘애국심’을 강조하며 ‘애국가’를 부르라고 국민에게 요구하지만, 국민들은 지금 애국가 부를 기력도 없다. 이 애국가의 작곡가가 친일파라는 사실을 접하면 더욱 머릿속이 혼미해진다.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는 1930년대에 독일 유학 중에 친일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2008년에 밝혀졌다. 애국가의 원본으로 볼 수 있는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이 일제의 괴뢰정부였던 만주국 창립을 기념하는 ‘만주환상곡’에서 따왔다는 주장도 나오고, 안익태가 나치 독일의 베를린에서 만주국 창립 10주년 기념음악회를 지휘한 동영상도 발굴되었다.

아직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만일 일부 학자의 견해대로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윤치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 귀족원 칙선 의원을 지냈다. 이러니 일부에서는 애국가 대신에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탄생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민족의 애환이 담긴 ‘아리랑’을 국가 대신 부르자는 의견도 나오는 게 당연하다. 모호한 ‘국가’보다 국가의 주인인 ‘민중’을 분명하게 선택하자는 것이다.

사실 안익태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져본 적도 없는 인물이다. 대한제국에서 태어나 일본제국주의를 거쳐, 해방 이후에는 유럽에서 활동하며 스페인 국적을 취득했다. 게다가 저작권법이 만들어지면서 스페인에 사는 안익태의 가족들은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애국가 저작권료를 꼬박꼬박 받아 왔다. 2005년에 안익태의 유족이 저작권을 정부와 국민에게 양도하면서 이 문제는 종료되었다. 이처럼 사실상 조국이 없거나 그다지 의미 없었던 사람이 지은 곡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킨다는 발상 자체가 터무니없는 일은 아닐까.

교황의 ‘조국 예찬’과 대한민국의 ‘국가주의’는 다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탈리아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늘 아르헨티나를 ‘조국’이라고 불러왔다. 추기경 시절 세르히오 루빈 등 이탈리아 언론인과 가진 인터뷰에서 교황은 “저는 나라 또는 국가보다 ‘조국’이라고 말하는 좋아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국가는 법률적인 용어이지만, 조국은 가족들과 고유한 문화, 이웃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그곳에 터 잡고 함께 살아가는 민중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애국심’이라고 말한다.

가톨릭교회가 ‘사해동포주의’라 해도, 복음은 구체적인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 민족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과 문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낼 수 없다면, 누구든 하느님을 만날 재간이 없다는 게 교황의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교황의 조국 예찬은 ‘국가주의’와 다르다.

교황의 조국, 아르헨티나의 국가(Himno Nacional Argentino)는 비센테 로페스 이 플라네스가 작사하고 작곡가이자 음악 교사인 블라스 파레라가 작곡한 것을 1848년에 후안 페드로 에스나올라가 편곡했다. 하지만 가사가 독립전쟁 때 쓰인 것이어서 스페인에 대한 비판적 내용이 많아 1900년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가 반(反)스페인적 내용이 없는 1절과 마지막 절만 부르게 법령을 제정했다. 이후 논쟁 끝에 1924년에 다시 개정된 가사로 1944년에 아르헨티나 헌법을 통해 국가로 공식 결정되었다.

“Oíd, mortales, el grito sagrado(사람들아, 들어라, 성스러운 외침을)”로 시작되는 아르헨티나 국가는 “자유, 자유, 자유!”를 외치며 “풀린 쇠사슬의 소리를 들어라. 고귀한 평등이 왕좌에 오름을 보아라”로 이어진다. 이어 “세상의 자유인들이 화답한다. 대 아르헨티나 민중 만세! 대 아르헨티나 민중 만세!”를 부른다.

식민지 경험을 지닌 다른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 국가 역시 민족해방과 민중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역사성이 듬뿍 묻어난다.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자란 교황이 신자유주의 경제 아래서 새로운 식민지 백성이 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소망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이들과 똑같이 식민지를 경험한 대한민국이 친일파의 유산을 ‘애국가’ 삼아 노래 부르는 것과 다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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