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교회와 세상] 팔레스타인과 세월호 희생자를 기억하며

사람이 늙으면 서쪽하늘이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황혼이 아름다운 것은 소멸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이제 어둠이 태양을 삼키고, 깊은 두려움 속으로 살아있는 목숨들을 밀어 넣는다. 신앙이란 그 어둠마저도 새벽을 잉태하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으로 밤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이다.

세월호에 탔던 무고한 영혼들이 물에 깊이 잠기고 시신이 되어 부모에게 돌아왔다. 아직 수면 깊은 곳에 잠겨서 지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이 사람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오히려 삼풍백화점 붕괴가 다행스러운 참혹한 죽음이다.

유가족에겐 고통스러운 100일이 지났다. 그리고 희망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이 억울한 죽음을 애곡하는 사람이 늘어도 부활은 없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며, 책임의 한끝을 쥐고 있던 유병언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조사결과가 맞다면 이미 이승을 떠났다. 그리고 책임의 다른 한끝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권력의 중심에 있다. 누군가 충분히 슬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세력이 더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슬픔이 차올라야 부활을 경험할 것이다.

어찌 보면 ‘무관심의 교회화’가 문제다. 일부 교회 지도자와 사제와 평신도들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가슴 아픈 미사를 봉헌하고 있지만, 대다수 신자들과 교회는 오직 ‘교황 방한’ 이벤트에 골몰해 있다. 교황청에서는 “행사보다 메시지에 주목하라”고 하였지만, 사실상 행사가 중요한 교회, 어쩔 수 없다. 교황은 “누가 이들을 위해 울어줄 것인가?” 묻고 있지만, 당장의 잔치 준비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몰살도, 세월호 희생자들의 외마디에도 답하지 못한다.

교회는 언제나 ‘예수 부활’에 주목해 왔다. 그러나 십자가를 기억하지 않는 부활은 의미 없다. 예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세월호 희생자들과 함께 치솟는 화염과 가라앉는 물속에 계신다. 그분은 슬픔의 사람이고, “끝없는 슬픔은 끝없는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복음의 기쁨> 265항)고 교황은 말한다. 그 슬픔과 사랑의 열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구원은 없고, 부활도 없다. 예수를 이해할 수도 없다.

▲ 그리스도와 라자로의 누이들 (코레지오, 1518년)
예수는 마지막 생애에서 두 번 눈물을 흘렸다고 복음서는 전한다. 먼저 예수는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이 슬픔의 세상에서 비껴나 돈벌이에 정신이 없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울었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은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요한 11,33-36)

예수는 슬픔의 힘으로 라자로를 살렸다. 그러나 성전의 제사장들은 이런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상으로 밥을 벌어먹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예수는 눈물을 흘리셨다. 이때 예수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 하고 안타까워했다. 예수는 예루살렘의 붕괴를 예감하시며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이르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대량 살해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세월호 희생자들의 죽음으로 함께 고통 받는 하느님이다. 그 하느님 없는 곳에서, 하느님을 예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다. 예수는 눈물을 흘리시고 곧바로 성전에 들어가 환전상의 탁자를 뒤집고 장사치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결국 예수의 마음은 가련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슬픔에 젖고, 이 가련한 인생들을 품어주어야 할 종교가 타락한 것에 깊이 절망했다. 가련한 인생을 구하고, 타락한 종교를 비판하는 일은 기득권자들의 숨은 의도를 드러내기 마련이어서 예수는 살해당했다. 예수가 어린양처럼 도살되기 전에, 로마의 병사들은 예수에게 청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왕관을 씌운 뒤, 그를 왕위에 올려놓고 “유다인의 왕 만세”라고 소리치며 대관식 놀이를 거행했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쓴 게리 윌스는 “예수에게 세속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짜 의복을 입도록 했던 그 장면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에 의해 수세기에 걸쳐 계속적으로 반복되었다. 동방과 서방을 막론하고 그리스도교 황제들이 가장 먼저 그렇게 했다. 그 후에는 교황들이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교회는 줄곧 교회지도자들에게 정치적 예복을 입혀 온 것이다. 이는 예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며, 예수가 한사코 거부했던 짓이며, 예수의 숭배자들이 교황에게 보석이 박힌 삼중관을 씌우며 본시오 빌라도의 행위를 반복하는 동안 예수는 여전히 모욕당해 왔다.

다행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황의 삼중관은 사라졌고, 대관식도 즉위 미사로 바뀌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붉은 신발 대신에 검정 구두로 바꿔 신었다. 교황이 황제의 복식을 내려놓고 ‘로마 주교’로 돌아온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제 교회 역시 ‘파파’ 프란치스코를 변곡점 삼아 관료주의에서 벗어나 하느님처럼 인간의 몸을 입어야 한다. 교회법보다 마음의 법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본당에서 지금도 교리 시간에 “죄를 지으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다”는 험악한 말을 듣는다. 두려움에 기대어 연명하는 종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자녀들이 “저는 이제 지옥에 가는 건가요?” 하고 물으면 “스스로 자신이 가톨릭 신자인지 의심할 때가 있다”고 했던 평신도신학자 게리 윌스처럼 이렇게 답해야 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줄 수 있는 건, 네가 만약 지옥에 가게 된다면, 아버지도 너와 함께 갈 거란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심지어 지옥에 가더라도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분은 영광 가운데 계시지 않고 한사코 고통 받는 이들 가운데 계신다.

▲ 지난 8일 시작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공격이 23일째 이어지고 있다. (사진 출처 / 로이터 동영상 갈무리)

예수는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만’ 기억하라고 다그치신다. 나도 사랑 때문에 십자가로 오르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참수보다, 맹수형보다, 화형보다 야만적인 형벌이 십자가형이었다. 미리 매질을 당하고, 자신의 사형 도구가 될 가로막대를 양어깨로 메고 가서, 발가벗겨진 다음 세로막대에 묶여 질식사한 예수였다. 부활은 예수에게 예고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무상으로 주어진 결과였을 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미사에서 바오로 성인의 말을 빌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수는 그저 사랑했을 뿐이고, 하느님의 응답이 부활이었다.

이처럼 교회 역시 ‘영광’에 앞서 ‘십자가’를 기억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애간장을 녹이며 십자가를 지고 있다. 단원고 앞에서 팽목항까지, 가자지구에서도 십자가가 노변에 즐비하다. 그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자. 슬픔으로 슬픔을 삭이고 사랑을 잉태하여 부활을 출산하자. 나자렛 변방에서 ‘동행하자’며 주저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걷는 마리아처럼, ‘온유한 사랑의 혁명’을 이루자.

아직 우리 사랑이 작아서 그만큼 두려움이 많을 것이다. 오늘 일용할 빵을 구하기에도 버거운 날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지옥까지도 따라와 곁에 머무실 분이 하느님이시라면, 예수께서 그 길을 걸어 우리에게 왔던 것처럼, 슬픔조차 위로가 되는 신앙을 기쁘게 맞이하자. 교황이 한국에 와서 하실 첫 발언은 ‘슬픔’이며, 이 슬픔을 이기는 ‘사랑’일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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