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영화]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브라이언 싱어 연출, 2014년작, 현재 상영 중

▲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브라이언 싱어 연출, 2014년작
최근 개봉하는 할리우드 영화 중에는 슈퍼 히어로와 슈퍼 악당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원작으로 한 것들이 많다. 이런 영화들의 가장 중요한 재미 요소는 상상한 것을 거의 모두 현실처럼 눈앞에 펼쳐내는 기술력으로 만든 스펙터클한 볼거리이다.

현재 극장에서 개봉 중인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가 바로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는 국내에서 4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관람했고, 전세계적으로 6억3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6천억 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어 올해 상반기 최고의 흥행 영화 자리를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돌연변이 슈퍼 영웅과 슈퍼 악당의 대결

이 영화는 유전자 변이에 의해 특별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 돌연변이들의 이야기인 엑스맨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2000년 개봉한 <엑스맨>을 시작으로 2003년 <엑스맨2>, 2006년 <엑스맨: 최후의 전쟁>, 2009년 <엑스맨 탄생: 울버린>, 2011년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2013년 <더 울버린>, 올해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로 이어져왔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는 돌연변이들의 다양한 능력을 생생하게 구경하는 것이다. 무한하고 빠른 치유와 무기를 손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울버린, 사람들의 생각을 조정할 수 있는 프로페서X, 쇠붙이를 움직이는 강력한 매그니토, 구름을 움직이고 번개를 불러올 수 있는 스톰, 모든 물체를 움직이고 사람들의 생각을 조정하는 진, 누구의 모습으로도 변신 가능한 미스틱 등은 물론, 얼음으로 만들기, 불을 조정하기, 순간 이동이나 물체를 통과하기, 하늘 날기, 음속만큼 빠르게 움직이기 등등 영화는 진기하고 흥미로운 능력을 가진 캐릭터들로 넘쳐난다.

한 번쯤 내게 있었으면 하고 상상해 봤거나 혹은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능력들이 영화 속에서는 현실이 된다. 게다가 그들은 그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식으로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데, 극장에 앉아 그 상상의 세계를 실제처럼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엑스맨 시리즈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영화를 연출했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다시 연출에 참여한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는 엑스맨 팬들에게는 스펙터클한 액션 이외에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미래로부터 시작하는데, 그 미래에는 인간이 만든 센트럴이라는 로봇이 돌연변이는 물론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진 인간과 돌연변이들을 도와주는 인간까지도 몰살하는 미래다.

그 미래를 바로잡기 위해 울버린이 과거로 보내지면서, 영화는 과거와 미래인 현재를 오가며 펼쳐진다. 그 때문에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통해 관객들은 지금까지 엑스맨 시리즈 전편들의 주요 서사를 이끌었던 인물들과 그들이 얽힌 사연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영화에 마치 숨은 그림처럼 배치되어 있는 이러한 요소들을 찾는 것도 팬들에게는 재미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엑스맨 시리즈를 이미 본 관객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엑스맨 시리즈를 전혀 보지 않은 관객도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충분한 배려를 했다.

엑스맨 시리즈를 존속시키는 갈등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 프로페서X와 매그니토
볼거리와 스타 배우의 등장이라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장점 이외의 영역에서 이번 엑스맨 영화의 흥미로운 점을 언급하자면, 그것은 10년간 이 시리즈를 이끌어왔던 갈등을 그 어떤 영화에서보다 서사의 전면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프로페서X와 매그니토라는 두 인물의 갈등이 시작되는 지점, 즉 ‘인간과 돌연변이들은 과연 공존이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에 대해 이 영화는 잠정적인 수준의 결론을 내린다.

영화의 악(惡)을 담당하는 매그니토라는 인물이 인간을 공격하고 지배하려고 했던 이유는 돌연변이들을 향한 인간의 적대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돌연변이들을 적대시하고 말살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최고의 방어인 공격을 감행한다. 매그니토와 맞서는 돌연변이 집단이며 영화의 선(善)을 담당하고 있는 엑스맨을 이끄는 프로페서X는, 돌연변이들을 향한 인간의 적대를 폭력과 지배가 아닌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믿음이 이 영화를 이끄는 두 인물 프로페서X와 매그니토의 갈등이 발생하는 시작점인 것이다.

<엑스맨: 데이즈 오프 퓨처 패스트>의 위태로운 해피엔딩

오락성에만 무한 초점을 맞춘 듯 보이는 영화 중에도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와 같은 진지한 주제를 가진 영화는 꽤 많다. 물론 철학적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곧 그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는 할리우드 영화답게 인간의 선에 대한 무한한 신뢰에 기댄 해피엔딩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해피엔딩이 전달하는 메시지, 즉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메시지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그것은 그 해피엔딩이 인간의 적극적인 선택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영화에서 인간과 돌연변이의 말살이라는 비극적인 미래를 바꾸는 순간은, 돌연변이 중 한 명인 미스틱이 돌연변이들을 없앨 무기를 개발하는 천재 과학자 트라스크를 향한 총구를 내려놓는 순간이다. 즉 평화로운 미래는 인간을 향한 믿음과 그것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돌연변이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평화를 위한 돌연변이들의 행동과 비교해서 영화 속 인간은 어떠한가? 엑스맨 시리즈에서 인간이 돌연변이를 적대시하는 이유들을 보노라면 인간은 탐욕스럽고 오만하며 의심으로 가득 찬 존재일 뿐이다. 인간은 단지 자신들이 그려 놓은 인간의 모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돌연변이들에게 적대적이며, 그들의 능력으로 인해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할 뿐이기 때문이다.

즉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는 잠정적인 결론을 보여줬지만 그 평화는 영화에서 줄곧 비춰준 인간의 모습과 그런 인간을 의심하는 매그니토의 존재 때문에 불안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감은 속편을 제작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인간의 경계가 만드는 적대와 폭력을 폭로하다

이번 영화의 결론이 무엇이든 간에, 엑스맨 시리즈의 인간 대 돌연변이의 적대 구조에서 돌연변이가 슈퍼맨과 같은 외계인이 아니라 인간 가족 구성원의 일부라는 설정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의 글에서 줄곧 돌연변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인간과 그들을 구분했지만, 영화는 결국 그들도 인간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돌연변이들은 진화를 통해 탄생한 인간과 분리된 새로운 종이 아니라, 인간의 일부이며 가족이라는 것인데, 이는 인간이 스스로를 정의하면서 그어 놓은 정체성의 경계가 얼마나 자의적인 것이고 그 경계 밖을 향한 인간의 적대가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A=B라고 스스로 정의하면서 그것이 자연의 질서이고 절대적인 불변의 진리라는 믿음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이성애적인 사랑에 대한 배타적인 믿음, 여성의 본성에는 모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자의적 해석, 인류의 진화는 우성의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생각 등이 그것이다.

이런 믿음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의 기준을 만든다. 물론 판단을 내리기 위한 기준은 중요하다. 우리는 늘 판단과 선택의 기로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준을 세우고 경계를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새롭게 하는 과정을 지속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은 결코 완벽하지 않으며 그 능력 또한 무한하지도 않은, 유한한 존재일 뿐이니 말이다.

엑스맨 시리즈의 프로페서X는 돌연변이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능력의 힘을 믿는다. 그것은 더 좋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더 좋은 세상을 향한 희망이란 것은 불변하는 경계를 가지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인에게 이 경계라는 것은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기실 그리스도 가르침의 많은 것들, 예를 들어 사랑, 희망, 믿음, 친절, 온유와 같은 것은 타자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그어 놓은 경계를 지우는 것으로부터 실천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최근 흥행한 영화에는 이러한 경계에 의해 상처받은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한다. <겨울왕국>의 엘사, <말레피센트>의 말레피센트, 엑스맨의 모든 돌연변이들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즉 인간이 자의적으로 그어 놓은 경계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받고 주변의 적대에 직면한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인간의 탐욕을 채우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고통 받는 인물들이 결국에는 행복을 찾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에 관객들이 열광하는 것은 왜일까? 그 이유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계들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 위로를 얻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더 좋은 세상, 더 많은 사람들이 적대와 상처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세상, 더 많은 경계가 사라진 세상.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라는 오락거리 영화가 꿈꾸는 세상이 우리 삶 속에도 실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보통 인간들에게 주어진 희망과 믿음이라는 능력이면 가능할 일일까?
 

 
 
성진수 (시릴라)
영화연구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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