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평신도 교양 - 5]

들어가며: 천주당은 윤지충의 무덤 위에 세워질 것이다.

‘평신도 신학’이라는 오래된 숙제를 받아들고 벌써 5회를 맞았다. 지난 글에서 필자는 5백만 신자 시대의 한국 천주교가 이미 큰 다양성을 지닌 집단으로 성장하였고, 그에 걸맞은 새로운 신학과 교양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공의회 정신과 복음 정신으로 우리를 스스로 돌아보는 ‘연극적 치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번 회에서는 새로운 평신도의 좌표로서 윤지충 바오로의 ‘신주 사건’을 생각해 보겠다. 이 글을 준비하며 특히 아래의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박해시대에 ‘관변 측 자료’를 정리한 <사학징의>에 실린 기록인데, 윤지충이 죽고 2년 후에 이루어진 신문에서 동료 순교자들이 똑같은 말을 세 번이나 하셨다.

“천주당은 윤지충의 무덤 위에 세워질 것이다.”
- 이우집 신문기록 (1801년 3월 28일) 1번
- 유관검 신문기록 (1801년 3월 28일) 2번

복자와 성인의 대량생산?

윤민구 신부님은 교회사 분야의 전문가이자 로마와 한국에서 103위 순교 성인 관련 사업에 깊이 관여한 분이다. 윤 신부님이 지으신 <103위 성인의 탄생 이야기 - 특별한 한국 천주교회사>(푸른역사, 2009)는 매우 인상 깊다. 103위 순교 성인 사업에 대한 깨알 같은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들어 있고, 몇몇 내용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과연 ‘순교자 현양 사업’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한마디로, 복자와 성인을 ‘더 빨리 더 많이’ 탄생시키는 일은 아니다. 우리는 물량주의, 성공주의, 국위선양 등 세속화된 정신으로 이 일을 봐서는 안 된다. 성인과 복자는 올림픽 같은 국제 경기에서 금메달 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103위, 124위 같은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한 분 한 분의 삶과 신앙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분들을 따라 삶을 성찰하는 것이 후손의 도리일 것이다.

위 책은 103위 순교 성인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현실과 심지어 일부 공식 행사에도 103위의 순서가 다르거나 영문/국문 이름이 혼동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성인 한 분을 모시기 위해 오랜 세월 노력하는 수도회나 교구의 예를 들었다.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백 년 이상 기도하며 실천하는 곳도 많다. 본디 성인 공경의 올바른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인간형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번에 시복되시는 124위의 대표이신 윤지충 바오로의 ‘신주 사건’에 대해서 몇 가지 성찰을 나눠 보고 싶다. 한국의 순교자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축적하는 일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고, ‘진산 사건’은 지금 우리에게도 새로운 빛을 비춘다고 생각해서이다.

정병설이 지적하듯, 조선 후기 천주교 순교자들은 “예전의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간이었다.” 세상을 완전히 긍정하면서도 세상의 가치를 헌신짝처럼 버렸고,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감사했다. 대역죄는 전통적으로 가장 큰 치욕이었다. 끔찍한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고 삼대가 멸실하는 형벌을 받을 수 있는 죄목이었다. 그들은 그런 죄를 바보처럼 순순히 인정하였으며, 탄압이 심할수록 오히려 더욱 뚜렷하고 강렬한 목표를 공유했다. 이처럼 현세적 보상을 버렸으면서도 동시에 매우 강력한 집단적 의지가 일찍이 한국 역사에서 이처럼 대규모로 실현된 적이 없다.

그런 새로운 인간형의 첫 머리에 윤지충이 있다. 그는 신주를 불태웠다! 이 일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필자는 여기서 또 하나의 새로운 한반도인의 유형을 본다. 유교 문화가 깊이 남아 있는 한반도에서는 21세기를 사는 지금도 신주에 감히 손댈 수 없다. 그런데 유교가 서슬 퍼렇게 살아 있던 그 때에 양반집 자손이 자기 조상의 신주를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신주를 불태우다

윤지충은 명문 양반집 자손이었고, 조상들도 훌륭했다. 그의 아버지가 진산에 정착하였는데, 현재의 대전이다. 윤지충은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이후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 집안에서 천주학을 접하였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보면, 윤지충은 신주에 “부모님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스스로 신주를 불태우고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제가 부모님이 거기 계신다고 생각하면서 신주들을 불태웠다면 형벌은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확신범이었고, 소신을 굽히지 않은 죄로 1791년 11월 13일 순교했다.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이 짧은 글에서 당대의 제사 금지 규정까지 다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신주를 불태운 그 사건만 조금 더 들여다보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스스로 묻고 싶다. 우리는 우리의 신주를 태울 수 있는가.

두 가지 신주

신주란 ‘죽은 사람의 위패’를 말한다. 대개 밤나무로 만드는데, 길이는 여덟 치, 폭은 두 치가량이고,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지게 생겼다. ‘사판’이라고도 한다. 곧, 신주는 나무 위패로서 죽은 조상을 상징하며, 사당에 안치하였다. 다만 신주를 모실 사당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일반인들은 일회용 신주격인 지방을 쓰는 일이 있다. 지방은 종이로 만들어 제사 후 불태운다.

신주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위에서 말한 본래 의미의 신주다. 이 신주는 지금도 일부 유교적 전통이 강한 집안에서 그 자체로 유효하게 유지된다. 신주는 여전히 죽은 조상을 상징하기에 함부로 다룰 물건이 아니고, 그 앞에서 마음가짐과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자기 조상의 위패를 함부로 하거나 불태운다면 지금도 큰 비난을 받을 것이다. 이런 전통이 지켜지는 한국은 아직도 엄연한 유교 국가다.

둘째로, 현대에서 신주는 비유적으로 살아남아서 우리의 일상용어로 쓰인다. ‘신주 모시듯 한다.’라는 표현은 ‘무척 귀하게 여기어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다루거나 간직하는 모양’을 이른다. 이 둘째 표현은 논쟁적 맥락에서도 퍽 자주 쓰이는데 적대자들의 신념을 깎아내리는 데 쓰인다. 예를 들어, 좌파를 공격할 때 ‘낡은 계급 이념을 신주처럼 모시는 자들’이라고 한다. 반대로 우파를 공격할 때, ‘미국이나 개인의 이익을 신주처럼 모시는 자들’이라고 공격한다. 또는 풍자적인 맥락에서도 자주 쓰인다. ‘보신과 안전을 신주 모시듯 하는 관료’ 등의 표현을 예로 들 수 있다.

내 마음의 신주

그런데 필자는 ‘내면화된 신주’를 보고 싶다. 우리는 모두 마음에 모시는 귀한 신주가 있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신주처럼 모시는 것’이 공격당하거나 폄하되면 큰 실망과 함께 매우 공격적 반응을 보인다. 조선조 말엽에 천주교를 탄압한 사대부들이 그러하였다. 그런데 사대부 윤지충은 바로 그 신주를 공개적으로 버렸다.

상대화하는 용기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변절자에게 더욱 가혹하다. 신념을 바꾼 ‘어제의 동료’를 매섭게 공격하는 예는 흔하다. 윤지충을 심문하고 죽인 사람들은 본디 같은 가치를 숭배하던 사람들이었다. 어제까지 ‘같은 신주’를 모시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 신주를 버린 윤지충은 그들에게 ‘오늘의 적’이 되었다.

그들은 천주학을 ‘사학’이라 불렀다. ‘사악한 학문’이란 뜻이지만, 현대의 어감으로는 ‘나쁜 이념’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신주 사건 이후로 천주교인 가운데 양반들은 거의 배교했고, 이후 천주교는 일종의 민중운동화 되었다. 그리고 거의 백 년간 이 땅에서 ‘천주학’은 ‘종북’이나 ‘빨갱이’ 같은 말이 되었다.

윤지충은 명문가의 자제로서 신주를 태워버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심문 과정에서도 자신의 뜻을 그대로 피력하였다. 그는 오히려 사대부들에게 너희들이 모시는 신주가 틀렸다고, 과거의 동료들의 한계를 담담히 지적하였다. 어떤 면에서 그는 이 땅 최초의 양심적 내부 고발자일 것이다. 어쩌면 신주를 버리는 용기는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용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득권을 상대화하는 용기’가 한국 천주교의 DNA에 새겨져 있다.

신주라는 신학어

신학한다는 것은 결국 내면화하는 것이다. 신주는 한국에서 새로운 신학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주는,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스스로 가장 포기하기 어려운 낡고 인간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말로 쓰일 수 있다. 신앙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가장 소중하게 모시는 신주마저 버릴 용기를 요구할 때가 있다. 믿음을 위해서, 윤지충이 버렸던 바로 그것을 우리도 지금 버릴 수 있을 때, 윤 바오로를 계승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보았듯, ‘남의 신주’는 주로 타인을 공격하는 맥락에서 쓰인다. 여기서 신학화 할 수 있는 신주는 ‘나의 내면의 신주’다. 나의 내면에서, 하느님을 위해 상대화할 수 있는 모든 반복음적인 것을 신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익이든 이념이든 경험이든, 자신의 신앙을 위해 버릴 수 없다면, 윤지충을 박해하는 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윤지충의 ‘신주 사건’은 신앙의 근본적 결단을 선명히 제시할 수 있는 우리의 고유의 전승이다. 최초의 순교자들은 ‘신주마저 버릴 수 있는 신앙’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신앙의 후손들 내 마음의 신주는 무엇이었는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나가며: 신주를 버린 자리에 세워진 천주당

윤 바오로가 죽고 2년 뒤에 동료 순교자들은 심문 과정에서 “천주당은 윤지충의 무덤 위에 세워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내면의 가장 소중한 신주를 불사를 수 있을 때, 우리는 바로 그 위에 신앙의 집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기득권을 상대화할 수 있는 용기야 말로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신앙의 유산이 아닐까.

이 글을 구상하는 가운데 마침 프란치스코 교종의 한국 방문으로 시복식이 치러진다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하느님을 소중히 모시기 위해 모든 기득권을 상대화시킨다는 면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의 가르침은 윤지충 바오로의 일생과 밀접하다. 개인적으로는, 교종께서 밀양과 강정을 방문하셨으면 참 좋겠지만, 오히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식이기에 치명터인 전주 전동성당이나 숲정이를 방문하셔야 선후가 맞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서,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했다. ‘평신도 신학자’의 자리를 기쁘게 모색하는 두 아이의 아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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