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평신도 교양 - 7]

이제 한병철의 통찰로 한국 교회를 바라볼 차례다. 이 글을 쓰는데 교종 프란치스코의 <복음의 기쁨>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 냉담의 정의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분들이 계실 것이다. ‘성사 생활의 유지 여부’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냉담의 기준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필자는 ‘열정적 신앙생활’의 대비되는 개념으로 냉담이란 말을, 조금 폭넓게 쓰겠다.

1. 냉담은 충전인가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본 대로, 자신에 대한 ‘긍정성의 과잉’은 ‘(매우) 바쁜 현대인’을 탄생시켰고, 결국 ‘자기착취’에 이른다.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는 ‘긍정성의 폭력’은 현대인의 일상에서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킨다. 이런 자기 착취는 경쟁 사회에서 가속화되어, 결국 ‘바쁨’을 멈출 수도 없다. 그 결과, ‘성과는 딱히 없으면서 끊임없이 바쁜 상황’에 빠져 버린다. 이런 상황은 우울증 등 경색성 질환의 원인이 되며, 완전히 타 버리는(burn-out), 곧 소진현상이 도래한다. 결국, 모두가 피로한 경쟁 사회에서 영혼은 경색된다.

한병철의 통찰은 한국 교회의 세속화 현상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기제를 제공한다. 교회 안에서 과잉 긍정하고 과잉 행동하는 신자들은 ‘바쁜 신앙인’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일부 열심한 신자’들은 (일이) 포화하고 동시에 (내면이) 고갈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 긍정의 과잉을 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온갖 단체에 가입되어 활동하기 때문에 성당에서 오히려 더 바쁘면서도 내면이 별로 기쁘지 않은 신자들을 볼 수 있다. 교회 일을 멈출 수도 없는 그런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이런 ‘바쁨의 가속화’를 멈출 수도 없고, 결국 ‘교회 안에서’ 우울하거나 소진된다.

하지만 ‘다행히’ 교회는 밥벌이 수단이 아니어서, 이런 ‘의미 없는 바쁨’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과잉된 긍정의 탈출구는 바로 냉담이다. 그래서 냉담은 열정과 한 짝을 이룬다. 소수의 엘리트 신앙인을 제외하면, ‘냉탕과 열탕을 반복하는’ 신앙생활이 탄생한다. 냉담은 ‘충전’과 ‘휴가’라는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2. 피로한 사회, 기쁘지 않은 사회

흥미롭게도, 교종 프란치스코의 <복음의 기쁨>은 <피로사회>에서 설명된 내면을 묘사한다. ‘기쁨’을 묘사하는 이 책에서, 교종은 ‘기쁘지 않은 상태’에 대해서도 몇 가지 설명을 하셨다. 대개는 별로 주목되지 않는 표현인데, 필자는 이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복음의 기쁨>과 관련된 강의에서 자주 인용한다.

도대체 기쁨은 무엇인가? 문헌의 첫머리인 1항과 2항에서 교종은 친절하게도 ‘기쁘지 않은 상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우선 1항은 ‘죄, 슬픔, 내적 공허, 외로움’을 언급한다. 이 네 가지 가운데 ‘죄’는 신학적 단어이고, 나머지 세 개는 심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아마도 이런 세 가지 상태를 동시에 겪게 된다면, 그건 ‘우울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병철이 말한 경색성 질환이다. 대개 우울증의 해결책으로 의학적 치료를 떠올릴 것이다. 상담과 약물치료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교종은 이런 우울증 같은 상태의 원인과 해결책이 ‘사회적 차원’에 있다고 제시하는 점에서도 한병철과 공통적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복음의 기쁨> 1항)

이어 2항에서 교종은 무분별한 욕심과 자극과 소외를 지적한다. 특히 ‘쾌락’은 이 문헌에서 ‘참된 기쁨’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이는 듯하다. 쾌락과 참된 기쁨의 차이는 무엇일까? 대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쾌락이라고 하고, (돈으로 살 수 없는) 참된 복음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충만함을 기쁨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런 ‘기쁘지 않은 상태’의 원인은 역시 사회적 차원에 있다. 그것은 지나친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다.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입니다. 이는 안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피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과 고립된 정신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 2항)

이어 2항에서 이렇게 기쁘지 않은 삶의 내면을 묘사하는데, ‘불만과 분노’는 조금 점잖은 번역이다. 독일어와 영어 등의 공식 번역문을 충분히 고려하고, 교종 특유의 구어체를 살려서 과감하게 옮긴다면, “열 받고(gereizt), 짜증나고, 포기한(listless)”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태의 사람은 분명 지치고 소진된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전해 주신 복음,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은 이렇게 피곤하고 경색되고 지치고 소진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기쁜 소식이다.

“많은 이가 이러한 위험에 빠져 삶을 잃어버리고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찬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 2항)

3. 긍정의 과잉, 행동의 과잉

교회 안에서도 피곤하고 경색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이어 나가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무작정 받아들인 ‘긍정의 과잉’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 뿌리를 깊게 파 내려가다 보면, 아시아 유교 문화권의 관계 지향성 문화, 현대 사회의 극심한 경쟁, 입시 위주의 교육, 극심한 소비주의와 개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 한국 교회의 특성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원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필자의 한계를 넘어간다. 그저 ‘모든 것을 긍정하고 모든 것을 해야 하는’ 현상을 조금 더 쉽게 묘사하고 싶다.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니오’(No)라고 말하기 힘든 분위기가 있다. 신부와 수녀의 말은 물론이고, 본당의 평신도 지도자들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한다. 더 많은 책임을 맡은 분들일수록 더욱 그러하고, 무조건 동의하고 행동하는 것을 모범적 순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다. 결국, 개인적 상황이나 판단이나 선호를 뒤로 물려두고, 모두를 긍정하고 모든 것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맞닥뜨린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찌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을까. 결국, 성당 안에서도 ‘눈치’가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 ‘표정관리’와 ‘긴장’을 해야 한다. 세상사와 같아진다.

물론 바쁜 신앙생활을 잘하는 신자들도 있다. 미사, 피정, 봉사, 기도, 친교 등에서 내면의 기쁨을 찾는 사람들이다. 이런 모범적 신자를 ‘엘리트 신앙인’이라 부르고 싶다. 학교를 예로 들자면 이들은 소수의 모범생이다. 수업 시간에 졸지 않고, 명문대 입시 위주의 교육을 충실히 소화하는 우등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평신도 모두가 모범생이고 우등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업시간에는 늘 엎드려 자지만 개근상을 받는 학생도 있다(사목자가 교사라면, 수업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계신지 묻고 싶을 때가 있다).

한병철은 그렇게 피곤한 사회에서 현대인이 ‘소진된다’고 관찰했는데, 필자는 일부 신앙인들이 교회 생활에서 소진되는 경우를 본다. 교종이 말씀하신, 짜증나고 열 받고 포기한 듯한 상태를 교회 안에서 겪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사제나 수도자나 동료 신앙인들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소진의 원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회 일로 소진된 신앙인들은, 사제나 수도자들이 누리는 ‘한 달 피정’과 같은 재충전의 기회가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그런 기회를 찾기 힘든 그들은 히브리 백성처럼 ‘탈출’을 꿈꾼다. 바로 냉담이다.

4. 냉탕과 열탕을 오가는 신앙생활

한병철이 관찰한 ‘현대인의 일상’과 이 글이 다루는 ‘평신도의 신앙생활’은 결정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평범한 사람은 직장과 일상생활에서 하차할 수 없다. 마치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처럼, 그들은 무한히 질주한 열차에서 절대 내릴 수 없는 승객이다. 과잉 긍정과 과잉 행동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현대인은 피로하고 결국에는 지친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다르다. 스스로 하차할 수 있다. 마치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는 학생들이 쉬는 시간만 되면 혈기왕성한 젊은이로 돌아가듯이, 지치고 힘든 성당 생활에서 ‘잠시’ 물러나고 휴식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건 실제로 필자의 경험담이다. 어떤 모임에서, 본인의 신앙생활을 ‘냉탕과 열탕을 오갔다’고 소개하시는 평신도들을 여러 번 보았다. 열심히 할 때는 본당의 단체를 열 개도 넘게 맡아서 하다가,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곧, 지치면) 주일 미사만 참석하고, 단체 활동은 온전히 쉬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본당 활동을 매우 열심인 분들 가운데도,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을 찾을 수 있다(한 번의 냉담 시기도 없이, 늘 끊임없이 열정적인 분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본당 활동 때문에 너무 힘들고 지친다고 호소하고 상담하는 신자들에게, ‘잠시 조금 쉬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하는 사목자들도 보았다(사실 그런 힘든 조언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지친다고 호소하는 분들은 대개 본당 안에서의 인간관계도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병철이 제공하는 통찰에 의지하자면, 그들은 교회 안에서 ‘소진’된 것이다. 인간관계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그들은 휴식을 누릴 ‘파아란 풀밭’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냉담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신앙생활이 집단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조화’되는 경향도 관찰할 수 있다. 대개 본당 사제의 교체 시기가 그런 계기를 만든다. 새로 사제가 부임하면, ‘잠시 쉬시던’ 과거의 일꾼들이 돌아오고(!), ‘그동안 너무 열심히 봉사하던’ 분들이 잠시(!) 쉬는 현상이 드물지 않다. 집단적 냉담 교체기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그동안 좀 쉬셨으니까’ 사목회의 임원을 새로 맡아달라고 하는 등의 말을 쓰지 않는가.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조금 심할지 몰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의 열정은 잠재적 냉담을 내포하고 있다.’

5. 열정의 파트너, 냉담

이런 의미에서, 매우 역설적이지만 냉담은 다행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탈출구의 순기능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을 버텨야 하는 한국인이다. 긍정의 과잉, 행동의 과잉을 넘어, 무한 긍정과 무한 행동의 삶에서 무한히 도전하고 그 결과에 일희일비하며 지치고 소진된다. 별로 성과는 보이지 않는데 끊임없이 기대하고 행동해야 겨우 먹고 사는 삶이다. 밤새 작은 가게를 지키는 가장들, 자녀를 두고 일을 해야 하는 어머니들, 투잡, 쓰리잡의 삶을 사는 이들이야 말로 1년에 한 달 휴가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교회는 휴식처인가, 아니면 긍정하고 실행할 ‘또 하나의 일’인가. 냉담이 순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충전의 시기라는 점이다.

열정과 냉담을 구조적으로 오고 가는 현상은 왜 일어날까. 교회에서 소진 되고, 냉담으로 충전이 되는 현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냉담을 계획하거나 선망하는 열심한 신자의 내면’이 발생한다. 잠재적 냉담이다. 지금은 여러 가지 단체 활동을 열심히 하지만, 몇 년 후에는 일을 조금 덜려는, 물러나려는, 조금 더 차분하고 사색적인 신앙생활을 선망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냉담은 열정과 한 짝이다. 바쁘고 세속적 삶을 사는 사람에게 교회는 안식처를 주는가. 바쁜 교회 활동을 사는 평신도들에게 냉담이 피정이 되는가(그래서, 역시 심한 말일지 모르지만, 냉담은 평신도의 지혜인가). 냉담을 무한히 긍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평신도들의 냉담을 조금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본래 이 글로 마무리하려 했는데, 글이 좀 길어졌다. 동료 평신도들을 관찰하고 공감하는 평신도 신학자는 조금 더 할 말이 있다. 한 달 후에 8회에서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겠다(이 글을 쓰는데 생각을 나눠준 동료 평신도 박승진 스테파노에게 감사드린다).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서,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했다. ‘평신도 신학자’의 자리를 기쁘게 모색하는 두 아이의 아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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