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엠마오 첫째 날, 300여 명의 형제, 자매 평밭마을 순례 나서
"가장 어두운 그 곳에서 예수를 찾고자 합니다"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3-15)

‘누이와 형제가 함께 떠나는 밀양 엠마오’. 부활 팔일축제가 시작된 4월 21일 월요일, 300여 명의 사제와 수도자들이 밀양을 향했다.

예수의 죽음을 겪은 후 낙심하며 엠마오로 떠난 길, 제자들은 그 여정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 제자들은 예수가 눈앞에서 사라진 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 32)라고 고백한다. 제자들이 낙담과 절망으로 떠난 길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알아봤던 것처럼 이번 ‘밀양 엠마오’는 가장 고통 받는 자리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타오르던 마음’을 다시 기억하는 자리였다.

▲ 우리는 기도하며 걸어갑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찬미합니다. 아름다운 밀양의 자연이 본래의 생명력을 보존하기를 빕니다. 탐욕의 시대에 조금씩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합니다. ⓒ정현진 기자

21일 오후 2시 서울 대한문 앞과 각 수도원, 교구에서 출발한 사제와 수도자들이 부산교구 감물생태학습장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와 누이처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향한 곳은 부북면 평밭마을 127번과 129번 현장. 300여 명의 순례자들은 마을 입구에서 기도를 드린 후 첫 여정을 시작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루카 24,17)

“엠마오의 시작은 슬픔에 찬 절망에 가득한 고통스럽고 슬프다 못해 아픈 것이었습니다. 엠마오로 떠났던 제자들은 아무도 그 길에서 주님을 만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의 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슬퍼하고 아파하는 이 자리, “정말 하느님은 없는 게 맞다”는 말이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 마음 한 구석에도 그런 생각이 파고드는 지금입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에게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예수님을 애써 찾고자 합니다. 허둥대는 걸음과 기운 빠진 손과 발, 마음에 희망 하나 없는 가장 어두운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지 기대를 가지고 순례의 길을 시작했으면 합니다.”(나승구 신부)

129번 현장으로 오르는 30여 분 남짓 오르는 산길, 할매와 할배들이 매일 짐을 지고 유서를 품고 오르는 길이다. 순례자들은 저마다 기도를 하며 산을 오른다. 누군가 “사순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하자, 한 수녀는 “예수님의 고행이죠”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다 같이 묵주기도를 하자고 제안한 것도 아닌데, 저마다 손에서는 형형색색의 묵주알을 굴리고 있다.

129번 현장. 이곳은 지난 2012년 3월 1차 희망버스가 다녀간 곳이다. 주민들은 당시 희망버스를 타고 와 벌목한 자리에 영산홍을 심었던 수도자들과 사제들을 기억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127번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움막을 지키던 할매 둘이 반갑게 마중했다. 덕촌 할매는 고마운 마음이 앞서 자갈밭에 무릎을 꿇고 순례객을 맞는다.

127번 현장은 주민들이 탑신이 설 자리의 벌목을 막기 위해 전기톱 앞에서도 나무를 껴안고 싸웠던 곳이다. 나무들이 잘려나가 벌판이 된 곳에는 어느새 청년 활동가들이 주민들과 함께 만든 꽃밭이 생겼다. 탑신 자리에 세워진 움막은 둘레의 깊은 고랑 덕에 마치 한 채의 성과 같다.

“8대 째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고향을 잘 지키겠다는 조상님과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습니다. 그런데 죽고 나서 조상님 앞에서 고향을 지켰노라고 말하지 못할 것 같아,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도와주시면, 어떻게든 이 땅을 지키고 말겠습니다. 이 늙은이를 살려주세요.”

고향을 지켜달라는 시아버지의 당부를 기필코 지키겠다는 덕촌 할매는 “한전 사람들이 나더러 바보라고 하는데, 나 바보 맞다”라면서, “너무 힘들지만 이 싸움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인간의 도리를 다 할 것이다. 잘 지킬 테니 많이 도와 달라, 꼭 이길 것이다”라고 호소했다.

▲ 127번 현장으로 향하는 길. ⓒ정현진 기자

▲ "고맙습니다" ⓒ정현진 기자

 ⓒ정현진 기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 32)

순례에 이어진 ‘엠마오의 밤’. 깊어가는 밤과 함께 음악과 노래, 기도와 나눔이 어우러졌다. 순례자들은 밀양을 위로하는 음악과 노래, 기도를 준비했고, 맞이하는 이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밀양 송전탑 싸움에 함께 해 온 김준한 신부(부산교구)는 “이 자리에서 이런 일을 하게 되리라고 꿈도 꾸지 못했지만, 이 밀양이 내 삶을 더 성숙하게 만들어줬다”고 고백했다.

김준한 신부는 “사람들이 안타까움에 어르신들에게 예전의 평화로운 시절로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어르신들은 이미 돌아갈 과거가 없으며,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어르신들은 이미 과거의 그분들이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악의 실체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경험했고, 그 고통과 모욕의 깊이는 말로 다 할 수 없다”면서, “9년의 싸움으로 어르신들은 이 싸움이 끝나도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 긴 시간 모든 것을 투신했던 이들이 돌아갈 과거는 없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이 어르신들이 단지 과거가 되고, 또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면서, “이들의 삶을 과거라고 버리고 얻는 새로운 미래라면, 받고 싶지 않다. 이들이 유유히 살았던 시절들이 다져진 그런 미래가 주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싸움을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의라고 믿습니다.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단지 지켜봐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기도하고 함께 연대해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니다.”(이계삼 사무국장)

▲ 인천 노틀담 수녀회 수련 수녀들이 노래 공연을 준비했다. “송구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 무력한 마음 넘어 오늘은 저희가 반가운 우리 주님 부활 소식을 밀양 어르신들께 전하러 새벽을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신 주님 희망안에서 생명과 삶이 살아있는 평화로운 밀양마을, 정겨운 밀양 아리랑을 되찾으십시오, 저희가 함께 합니다 .밀양 할매 할배들 사랑합니다.” ⓒ정현진 기자

이어 밀양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은 “누가 너의 이웃이냐”는 성경의 말씀을 듣고 밀양 송전탑 싸움을 외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국장은 착한 사마리아인이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의 것을 털어 이웃을 돌봤다”는 말씀을 보며, 가려던 길을 갈 수 없었다면서, “너무 간절한 싸움이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모순과 끔찍한 자본 권력의 실체를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계삼 국장은 “300여 명 밖에 남지 않은 밀양 어르신들은 지금까지 겪었던 폭력과 수치, 모멸이 압축적으로 뭉쳐있는 시간에 서 있다”면서,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된다. 이 사회와 자본 권력에 할 말이 많고, 밝혀야 할 거짓과 술수도 많다. 그러니 끝까지 함께 해 달라”고 당부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넘어섰습니다. 유서도 썼습니다. 내 시신을 끌고 다니면서 싸우는 한이 있어도 막아설 것입니다.”

평밭마을 한옥순 할매는 아직 4개의 철탑 부지를 막고 있으며, 그것만 막아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어린 목소리를 냈다. 그는 “여러분이 곁에 있으니,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 고비를 넘길 것이다. 송전탑을 세워도 뽑아 낼 것”이라면서,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 우리는 할 수 있고 이길 것”이라며, 연대의 손을 내밀어달라고 호소했다.

▲ 127번 움막. 벌목으로 황폐해진 땅은 어느새 꽃밭이 됐다. ⓒ정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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