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영화] <탐욕의 제국>, 홍리경 감독, 2014년작, 현재 상영 중

3월부터 영화연구자 성진수 님의 ‘주말영화’ 연재를 4주 간격으로 시작합니다. ―편집자

▲ <탐욕의 제국>, 홍리경 감독, 2014년작
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전신을 방진복으로 감싼 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기계를 돌렸다. 독한 화학약품에 노출되어야 했고, 악취와 분진 가루 속에서 숨 쉬어야 했으며, 40분이라는 짧은 점심시간 동안 김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그들은 백혈병을 얻었고, 뇌종양으로 눈물을 흘리지도 걷지도 못하게 되었으며, 유방암을 선고 받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절박한 심정으로 근로복지공단과 회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들의 방문은 늘 입구에서부터 가로막혔고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들의 병과 죽음은 산업재해로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했고, 사과를 요구하는 그들의 절규에는 침묵만이 응답할 뿐이었다.

<탐욕의 제국>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불치의 병을 얻은 후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얼마 전에 개봉한 극영화 <또 하나의 약속>과 동일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는 실제 피해자들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다. 감독 홍리경은 2011년부터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고, 영화는 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 뇌종양 수술 후유증을 겪고 있는 한혜경 씨와 그녀의 어머니, 유방암 선고를 받은 박민숙 씨 등 피해자들의 삶과 투쟁, 그들의 증언과 못다 이룬 꿈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 하나의 약속>이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일한 소재를 다룬 <탐욕의 제국>이 또 개봉한다고 했을 때, ‘이미 다 알고 있는데’, ‘같은 얘기를 몇 번씩 하는 거야’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이미 <또 하나의 약속>을 소개하기도 했다.

특별한 사건, 그러나 우리와 너무나 가까운 일상의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욕의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두 영화의 관객 수를 보면 한국인 중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보다 보지 않은 사람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이 영화들에 대한 주류 영화산업과 언론의 관심은 실질적으로는 미미한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한 번은 꼭 들여다봐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을 마주할 기회가 생긴다면, 바쁜 일상을 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누군가는 끊임없이 그것을 상기시켜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두 번째 이유는 <탐욕의 제국>이라는 영화가 기사나 극영화와는 다른 시선으로 우리를 그 사건에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여러 사실과 사건들을 일관된 서사로 만들어 보여주거나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논리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감정을 자극해 피해자들을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고 관객을 섣불리 부추기지도 않는다.

방진복 안에서 눈만 내놓은 반도체 공장 근무자들의 스냅사진과 그 사진 속 인물들의 눈을 하나씩 자세히 응시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 영화의 카메라는 직장을 다니다가 병을 얻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 그들이 경험한 것과 생각들, 그들의 일상, 싸움과 죽음의 장면들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카메라를 따라다니며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일뿐이다. 영화가 유도하는 이러한 관찰은 문자로 기록되거나 극화된 것에서는 놓치거나 약화되어 버린 이 사건의 어떤 면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이 특별한 사건이 얼마나 일상적인 면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격한 분노와 울분에 차 있지만 함부로 감정적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기 때문에 싸움이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분노를 평상시 감정의 하나로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감정의 균형을 보여준다.

 
누가 이 사건과의 ‘연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숨 쉬듯 연기를 내뿜으며 멀리 서 있는 반도체 공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병을 준 곳이지만, 그저 평범한 한국의 공장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그 외관이 교과서에서 한 번쯤 봤음직한 공장을 상징하는 그림과 너무도 유사해서 놀라울 정도다. 국회에 출석한 삼성전자 부사장은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걸음걸이와 말투가 불편하게 된 한혜경 씨의 질문에 눈을 마주치지 않고 회피한다. 가해자로서 피해자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한국의 보통 직장인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삼성전자 본관 건물 앞에 늘어선 직장인들은 피해자들의 시위 현장 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다니며 자신들의 일상을 이어간다.

피해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근로복지공단 직원들이나, 운구 행렬을 막아서는 삼성 직원들이 특별한 악인인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인 거다. 이처럼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평범한 얼굴과 익숙한 공간은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가 외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회사에 입사해서 성실하게 일하다가, 병을 얻고 죽음에 이르는 것이 누구에게나 생기는 일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에서 일한 모두가 백혈병에 걸린 것은 아니잖아. 특별한 경우겠지”라는 말을 쉽게 한다. 하지만 <탐욕의 제국>은 조용하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특별한 경우가 누군가에게는 평상의 삶이 되었으며, 우리의 일상이 그들과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 일에 연루됨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말이다.

<탐욕의 제국>이 볼거리와 스타가 있는 오락영화의 즐거움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보다 더 중요한,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가 반드시 한 번은 들여다봐야 할 것을 보여준다.

독립영화가 많은 관객들에게 소개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권력의 치부를 들추는 다큐멘터리에 허락된 기회는 더욱 협소하다. <탐욕의 제국>은 소셜펀딩으로 개봉을 위한 재원을 마련했고, 극히 소수의 극장에서 상영을 이어가고 있다.

한 편의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 그런데 그 크기는 기실 영화 자체의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감독과 스태프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담아낸 반도체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더 멀리, 더 오래 퍼져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성진수 (시릴라)
영화연구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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