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 가난의 길 - 1]

그동안 생활하는 신학 칼럼을 집필해주신 황인수 신부의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찾아 떠나는 순례기를 격주 간격으로 이어갑니다. ―편집자

첫째 날. 가까스로 열차를 탔다. 테르미니 역에 자주 왔던 터라 이곳을 잘 안다고 여겼던 게 화근이었다. 아시시 행 열차를 타는 곳이 오른쪽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출발 시간이 다 되었어도 플랫폼에 기차가 안 들어오는 것이다. 이상해서 물었더니 반대쪽이라는 게 아닌가. 아뿔싸! 출발이 임박했으므로 배낭을 지는 둥 마는 둥 한 채로 마구 뛰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아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플랫폼을 뛰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겨우 제 자리를 찾아 한숨을 돌리고 서로를 바라보니 얼굴이 온통 땀으로 범벅이다.

무릎이 안 좋은 나무 수사에게 미안하다. 사진을 찍기로 한 나무 수사는 자기 짐에 더해서 사진 가방까지 지고 있는데 그 무게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순례 시작부터 이렇게 헐레벌떡이라니. 남은 기간은 이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매사에 꼼꼼하지 못 하고 뭐든 제 편한 대로 될 거라 믿어버리는 헐렁한 내 모습을 다시 본다. 혼자라면 뒤탈을 혼자 감당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이렇게 함께하는 여행에서는 그 후과를 함께 나누게 되는 것이다.

별호를 ‘나무’라고 하는 스테파노 수사는 시작부터 이런 법석인데도 아무 불평이 없다. 성품이 착하고 예술적 감성이 풍부해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형제다. 성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는 “착한 형제와 여행할 때 그와 한 마음이 될 수 없다면 이는 틀림없이 성질이 괴팍하다는 표시이며 영적인 감성이 부족하다는 명백한 증거다”라고 썼다. 나무 수사와 함께하는 순례길에서 어쩌면 내 본 모습이 드러나게 되겠지. 영적인 감성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최소한 괴팍한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좀 꼼꼼하게 따져보면서 계획을 세우고 움직여야지, 다짐해본다.

여기는 로마의 테르미니 역. 우리는 아시시의 가난한 성자 성 프란치스코를 찾아가는 길이다. ‘가난한 성자’라고 했지만 프란치스코에게는 오히려 ‘거룩한 빈자’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 만나는 모든 것을 친밀하게 여겨 형제자매라 불렀던 성 프란치스코. 그는 태양을 형님으로, 달은 누님으로, 나중에는 죽음까지도 자매라 불렀는데, 고집이 세어 제 뜻을 잘 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자기 육신을 나귀 형제라 부르기도 했다.

ⓒ김선명

그랬던 그가 가난을 ‘귀부인’이라 불렀던 것은 가난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그것은 프란치스코에게 가난이 흔히 생각하는 구질구질함, 비참함, 피하고 싶은 어떤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성인은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그를 질투했다고 한다. 성자에게 질투라는 말처럼 어울리지 않는 말도 없겠지만 그것은 가난한 사람이야말로 예수님을 가까이 모신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난을 거룩함의 집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를 ‘가난한 성자’, ‘거룩한 빈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거룩한 빈자, 이탈리아 말로는 ‘산토 포베렐로’(santo Poverello)가 된다. 그 어감을 살려 우리말로 옮기면 ‘거룩한 가난뱅이’ 정도가 될까. 우리는 아시시의 이 가난뱅이를 찾아간다.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고 가난의 고귀함을 선포했던 성인을 만나러 간다. 가난은 온통 천덕꾸러기가 되고, 욕심대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 세상, 때로 탐욕이 덕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1990년대가 시작될 때 우리 사회에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부유해지는 것이 모든 사람의 목표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어떤 이의 말로는 예전에는 “그 사람, 현실적인 사람이야”라고 하면 부정적인 평이었는데 요즘은 이런 말을 아예 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누구나 현실적인 이익을 찾아 움직이게 되었기 때문에, 이 말이 아예 쓰임새를 잃지 않았겠느냐는 얘기다.

사실 그렇다. 방송에서나 신문에서나 어떤 일이 가치 있다는 말을 할 때는 흔히 그것이 몇 조 원, 몇 백억 원의 투자 효과가 있다느니 비용 절감 효과가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한다. 우리 사회에서 무엇을 평가하는 최고의 기준이 돈임을 이렇게 매일 무의식적으로 배우며 우리는 살고 있다.

좌석 맞은편에 앉은 다니엘라라는 아주머니가 우리더러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묻는다. 로마에 사는 이 아주머니는 아시시 부근에 출가해서 사는 딸을 찾아가는 길이란다. “우리는 아시시로 가는 순례자입니다” 하고 대답하면서 목에 걸고 있는 타우 십자가를 가리켜 보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 타우 십자가를 매우 사랑했는데, 이 타우로 편지 마지막에 즐겨 서명했다고 한다. 거주하던 집의 문이나 벽 위에 이 십자가를 새겼다는 기록도 있다.

ⓒ김선명
내가 걸고 있는 이 타우 십자가는 돌아가신 우리 수도회 신부님의 유품이다. 신부님의 유품 중에서 이 타우 십자가를 발견하고 그 신부님처럼 살고 싶은 마음에 이 십자가를 얻어 걸고 다닌다. 신부님은 아마 프란치스코 성인을 사랑하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결국 이 십자가가 나를 이 순례길로 이끈 것은 아닐까.

사람의 생은 누군가를 찾아 누군가를 떠나는 이야기라고 한다. 출가한 딸이든 마음속에 담은 성인이든 그것을 찾아 우리는 부모를, 집을, 익숙한 것을 떠난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찾는 것을 만나게 된다. 단 진정으로 그것을 찾는 한에 있어서만.

어쨌든 열차는 놓치지 않았고 좋은 도반이 곁에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목적지가 있다. 이 여정의 끝에 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햇볕을 가리려고 내려놓은 커튼 사이로 스쳐가는 차창 밖 움브리아의 풍경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로 인사를 건넨다.

“평화와 선!”
 

 
황인수 신부 (이냐시오)
성바오로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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