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 가난의 길 - 2]

순례자 숙소에 짐을 풀었다. ‘레 스투오이에’(le Stuoie)라는 특이한 이름의 숙소다. ‘스투오이에’는 ‘돗자리’라는 뜻인데 초창기 프란치스코회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말이란다. 1219년(또는 1217년) 5월에 오천 명 이상의 형제들이 총회를 열었을 때 벌판에 나뭇가지와 돗자리를 엮어 지은 숙소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 총회를 ‘돗자리 총회’라고 부른다고. 5월이면 밤에는 아직 쌀쌀한 때다. 숙소 사정이 그 정도였으면 음식 사정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을 터. 그러나 그때 페루지아, 아시시, 스폴레토 등 근방 사람들이 당나귀와 수레에다 빵과 포도주, 치즈 등의 음식과 식탁보, 컵 등을 싣고 몰려왔다고 한다.

마치 복음서의 빵을 많게 한 기적 이야기를 보는 것 같다. “빵을 나눌 때 우리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빵을 나눌 때 우리는 형제자매를 알아본다”고 했던 이는 도로시 데이였다. 하느님 나라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웅장한 성당을 짓고 멋있는 영성 강의를 들으러 여기저기 찾아다니지만 혹시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데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곳을 찾는 데는 덮을 담요 한 장, 이웃과 나눌 음식 조금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 돗자리 총회를 묘사한 그림 (제공 / 김선명)

‘돗자리 총회’ 숙소는 아시시 역에서 가까운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 옆에 있다. 이곳은 평야 지역이어서 수바시오 산의 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아시시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한다. 기왕 순례 온 것, 걸어서 가 보기로 했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부터 거리에 깔린 붉은 벽돌을 밟으며 아시시 시내로 올라간다.

1997년 지진으로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무너지고 유명한 지오토의 벽화가 손상되었을 때 이탈리아 전역에서 복구 성금을 모았는데, 그때 붉은 벽돌에 성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과 출신 지역을 적어 이렇게 깔아 놓았다고 한다. 재미 삼아 벽돌 하나하나 눈여겨보며 걷자니 멀리 시칠리아 사람, 나폴리 사람, 베네토 사람, 온갖 지역 사람들이 다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공통되는구나.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다만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숨는 것. 그가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누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사랑으로 불태우면 우리는 그를 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프란치스코 성인도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다. 1182년 초에 태어나서 1226년에 하느님께 돌아간 성인이 지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은 그분이 사랑한 것과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같다는 뜻이다. 오래 전에 듣고 노트에 적어놓은 글귀를 떠올린다.

“얕은 못의 물이라도 바다를 본받을 수 있나니 그 본성은 같기 때문이다.”

▲ 성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벽돌 바닥과 ‘키에사 누오바’ ⓒ김선명

키에사 누오바(Chiesa Nuova)에 도착했다. 이 건물은 1615년 프란치스코의 생가 위에 세워진 교회로 키에사 누오바는 ‘새 성당’이라는 뜻이다. 성당 앞 광장 한 켠에 청동으로 된 두 사람의 입상이 있는데 남자는 옷 같은 것을 들고 있고 여자는 쇠사슬을 들고 있다.

프란치스코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회심하자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고 여긴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는 격분하여 그를 가둔다. 그러나 어머니 피카 부인은 어머니다운 사랑으로 아들을 풀어준다. 결국 프란치스코와 아버지 피에트로는 주교 앞에 가서 재판을 하게 되는데 프란치스코가 앞으로는 하늘에 계신 분만을 아버지로 부르겠다고 선언하며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자 피에트로는 흩어진 돈과 옷가지를 주워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여기 서 있는 청동상은 실은 프란치스코의 부모를 형상화한 것으로 청동상 옆의 명문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

“인류에게 아들 성 프란치스코를 (낳아) 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와 피카 부인에게 영원한 감사를 드리는 생생한 표지로 이 기념상을 세운다.”

잡으려는 아버지와 떠나려는 아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계획이 있고 아들에게는 아들의 꿈이 있다. 아버지의 세월은 지나갔으나 그에게는 힘이 있고 아들에게는 꿈밖에 다른 것은 없으나 떠나지 않으면 그는 어린아이로 남을 뿐이다. 키에사 누오바 성당 안에는 그가 갇혀 있던 집안의 감옥이 보존되어 있다.

▲ 성 프란치스코의 부모상, 그리고 ‘죽은 이의 문’ ⓒ김선명

제대 왼쪽, 결이 고운 예수 성심상 앞에 기도 촛불들이 밝혀져 있고 그 옆으로 난 문을 통과하면 프란치스코의 생가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는 회심하기까지 24년을 여기서 살았다. 성당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면 옷감을 파는 상인이었다는 아버지 피에트로의 작업장으로 여겨지는 장소와 당시 길의 흔적이 보존되어 있다. 아마 프란치스코도 이 길을 자주 지나다녔으리라. 벽으로 난 ‘사자(死者)의 문’(porta del morto) 옆에 걸린 테라코타는 어머니 피카 부인의 도움으로 집을 빠져나가는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시시의 오래된 건물들에는 대개 벽돌로 메워져 있는 ‘사자의 문’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도시가 분열되어 서로 대립할 때 안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사용되던 것이라 한다. 건물 1층에 있는 문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과는 독립되어 작업장이나 외양간으로 통해 있었고 땅으로부터 1미터쯤 높이에 작은 문이 하나 있어서 낮에는 나무 사다리를 놓고 집에 사는 사람들만 출입하는 문으로 썼다. 밤이 되면 이 사다리를 치워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집을 나온 문을 ‘죽은 이의 문’이라고 부른다는 것에 생각이 오래 머무른다. 그는 이 문을 열고 죽은 이들의 세계를 떠났던 것은 아닐까. 내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일하던 가장이 다쳐 생계가 막막해지자 일가족이 생의 끈을 놓아버리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이 핍박받고 한꺼번에 해고되고 스무 명이 넘도록 세상을 버려도 무관심한 세상에서 나는 산다. 이것은 정말 사는 것일까. 혹 우리는 다 죽어 있는 것은 아닐까. 키에사 누오바에서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서자 퍼뜩 그런 생각이 든다.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서 깨어나라.
그리스도, 그대 위에 빛나시리라.” (에페 5,14)
 

   
 
황인수 신부 (이냐시오)
성바오로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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