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때려눕힌 공권력의 무자비한 진압은 살인방조"


온국민을 분노로 들끓게 한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나흘 째. 그간 검.경찰의 수사와 관련자와 목격자들의 증언 등으로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의 과잉진압이 드러나고 있어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진상규명은 불가피하게 됐다. 유족과 용산참사 대책위원회 측의 진상규명 요구, 현장과 도심에서 연일 이어지는 촛불시위 등으로 설날을 앞둔 서울 도심의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고 있다.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이강서 신부는 22일 오후 8시 장위동 선교본당에서 봉헌된 미사 중 강론을 통해 경찰의 과잉진압은 살인방조이며, 정부는 국민에게 위임받은 공권력을 마구잡이식으로 사용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면서 이번 용산참사에 대해 강도높게 비난했다. 다음은 이강서 신부의 강론 전문이다.

 

 

 

 

 

 

 

 

과잉 진압이 아니라 살인방조에 해당하는 진압
국민이 위임한 공권력, 공동선을 위해 쓰는 것이 마땅


지난 20일 용산지역에서 발생한 아주 비참한 참사 소식에 대해서 논평을 좀 해야겠습니다. 논평을 해야되는 이유가 제가 몸담고 있는 빈민사목이 집없이 강제로 쫒겨나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만들어진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빈민사목위원회는 지금도 여전히 강제철거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사건을 크게 두가지, 국가의 주택 정책과 재개발 정책이 얼마나 비틀려져 있고 왜곡되어 있는지 살아 있는 교훈으로 볼 수 있고, 두번째는 공공의 질서와 국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도록 물리력을 갖춘 공권력이 상식과 윤리적 기준을 상실했을 때 어떻게까지 폭력의 수위가 올라갈 수 있는지 보여준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신앙인들은 이런 참사를 통해 깨쳐야 할 교훈은 뭔가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나라의 주택정책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것도 완벽한 정책은 없겠지만 우리나라가 고수해왔던 주택정책이란 것이 결과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뺏고 이미 넉넉한 사람들의 재산을 더 증식시켜주는 방식으로 실현되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정확히 얘기하면 우리나라는 105% 주택공급량을 가진 나라입니다. 그런데 자기 집이 없는 사람이 50%가 넘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집이 없어서가 아니라 집은 있는데 그 집을 구매하거나 그 집에 살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절반이 넘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50%도 안되는 사람들이 주택을 두세 채 가지고 있는 형국이라 돈이 없어서 자기 집을 살 수 없는, 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서민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머물수 있는 주거공간으로서의 주택을 공급하지 않았다는 것이 작금의 주택정책이었다는 사실을 이번 사건을 통해 명백히 봐야되겠습니다.

집없는 다수의 주거 공간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재개발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재개발, 좋은 얘기죠. 재개발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재개발을 통해서 누가 이득을 보는가? 원래 살고 있던 원주민들, 거기 몸붙여 살고 있던 세입자들도 재개발의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죠. 그런데 80% 이상 세입자로 이뤄진 주거 공간, 상가 건물이 20%도 안되는 소수의 소유자, 건물 소유자, 땅 소유자를 위한 정책으로 재개발이 된다면 결국 거기에 몸붙여 살던 80%의 세입자들은 아무런 대책없이 쫒겨나는 판국이 됩니다. 그사람들의 생계라든지 그사람들의 주거공간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재개발 정책이 과연 누구를 위한 재개발 정책인가요?

결국 가진 사람, 소수의 가옥주, 또 땅소유자를 위한 재개발이 진행된다면 유감스럽게 그것은 소수의 사람을 위한 이익을 보장해 주는 정책일 뿐이지 다수의 공동선이라든지 집없는 다수의 이익을 보장하는 재개발이라고 누가 믿겠습니까?

이번 용산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사람들은 가옥주가 아니었어요. 영세 상인이었고 상가의 세입자들로서 턱없이 부족한 보상비를 가지고는 앞으로 어디서고 먹고살 수 없기 때문에, 3개월치 영업이익을 보장해 준다고 했지만 그 3개월 이후에는 먹고살 생계가 막막한 이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저항이었던 것이죠. 나가서 3개월 뒤에 굶어 죽느니 여기서 죽기를 각오하고 자기의 권리를 외치겠다고 싸우는거죠. 죽기를 각오했는데, 죽기를 각오했던 것은 이렇게라도 살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살겠다는 그 사람들을 공권력은, 국가는 죽음으로 몰아낸 것입니다. 죽겠다니 진짜 죽어봐라, 결국 그 꼴이 된거죠

두 번째 살펴봅시다. 정치는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를 하는거예요. 공동선이라고 하는 것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모두의 이익을 위해 협상하는 것이며 정치입니다. 그리고 그 정치를 통해서 정권을 수립한 정치집단은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정책을 원할하게 수행하고 공동선을 보호할 목적으로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어요. 공권력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공권력을 행사할 때 원칙이 있어요. 그 원칙은 공권력을 행사할 때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행사해야 하는 것이예요. 왜냐하면 공권력이 남용되면 회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를수 있기 때문에 공권력을 행사할 때 심사숙고해서 최후의 순간에, 그것도 최소한의 한도 내에서 행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권력의 행사의 기본상식이고 원칙이예요.

국민이 위임한 공권력 철저하게 배신, 무자비하게 국민을 때려눕힌 것

그리고 공권력은 만약에 양자가 이해관계로 다투고 있을 때 누구 편을 들어야 합니까? 약자 편을 들어야 합니다. 공권력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국민이 그런 권한을 준 것이지, 국민을 때려 눕히라고 공권력을 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았어요 국민이 위임해준 공권력을 어떻게 사용했어요? 가장 힘없는 사람에게, 그것도 무자비한 방법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사용했어요. 이건 남용이라고 할수 없어요. 이것은 국민이 위임한 공권력을 철저하게 배신한 것입니다.

하다못해 농성을 하는 그 사람들에게 해산명령을 하고 안전조치를 한 후 해산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퇴거하도록 경고를 하거나 적절한 최소의 노력이나마 다했는가 봐야합니다. 진상조사가 나와 여러분이 다 아시겠지만, 검찰이 진상조사를 하고 있다는데 저는 그것을 보며 이보다 더 한심하고 딱한 노릇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찰의 이야기만 진실이고 피해자의 이야기는 왜 한마디도 고려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경찰이 발표한 것만 사실인 것처럼 얘기한단 말입니다. 경찰에서는 지금 발화의 원인이 화염병 때문이라고 추정해 얘기하는데 거기서 생존한 희생자들은 솜이 다 젖어 거기 불을 붙일수 없었다는거예요. 누구 말이 사실인거예요? 누구 말이 사실이예요?

희생자들의 증언이 사실인지 경찰의 추정이 사실인지 따져봐야 할 것 아니예요?
그런데 검찰은 일방적으로 경찰의 진술에만 의존해서 그것이 사실일거라고 보도하고 있고, 그렇게 몰아가고 있어요

경찰의 과잉진압을 넘어선 살인방조

희생자들은 지금 폭력시위를 조장했다는 이유로 6명이 영장이 청구된 상태입니다.
누구 주장이예요? 경찰의 주장이예요. 그리고 화염병을 투척하고 그러기 전에 이미 용역들이 3층에서 패타이어에 불을 붙여서 유독가스로 옥상에 농성중인 사람들을 압박을 했던 그 사건들은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단 말입니다.

어쨋든 경찰이 진압을 했던, 이 진압은 충분히 인화물질이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이 사람들이 이렇게 진압작업을 펴면 어떻게 돌출행동을 할지 이미 알고있는 상태에서 진압 작전을 했다는 측면에서는 이것은 과잉진압이 아니라 이미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했기 때문에 살인방조죄입니다.

살인방조에 해당하는 진압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사람들이 이렇게 살인하도록 누가 공권력을 위임했습니까? 그 사람들이 극렬 폭동을 진압했다 하더라도 극력 폭력 시위를 했다하면 불에 타 죽어도 괜찮은가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그사람들은 어떻게 죽어도 상관이 없는가 물어야 합니다.

가톨릭은 100년 전부터 인간의 존엄성 등 사회교리 외쳐

이건 아닙니다, 이건.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톨릭에서는 사회문제에 관한 사회교리를 100년 이상 외쳐왔습니다. 이 사회교리 핵심은 3가지예요.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은 존엄한 대우를 받을 천부적인 권리가 있는 사람이예요. 존엄한 사람 따로 있고 존엄하지 않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존엄하게 처우를 받을 권리가 있고 이것을 우리가 어떠한 사항에서라도 이 원리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 존엄성의 원리는 다시 두가지 하위원칙으로 분류가 되는데, 인간 존엄성의 원리는 공동선의 원리예요. 공동선 원리 우리는 각자 자기 좋을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도 이득이 되는 것이 나에게도 이득이 되는 그것이 정당한 이득이지요. 미안하지만 100명이 있는데 99명이 나때문에 희생을 당하고 나에게 이익이 있으면 그것은 이익이 아니라는 것이죠. 나의 이익은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말은 좋은데 이걸 어떻게 실현할까요? 공동선의 실현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적절하게 개선된 처우를 받을 때 비로소 공동선이 실현되는거예요. 그 사회의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느냐가 그 사회가 인간 존엄성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느냐의 척도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우습게 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얘기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런 뜻에서 그 사회의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받고 있는 처우 정도가 존엄성의, 그 사회가 어느정도 사람을 존엄하게 대하고 있느냐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연대성의 원리는 이웃과 맺는 사랑의 실천

두번째는 연대성의 원리가 있어요. 연대라고 하는 것은 그대로 어깨동무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연결하라는 뜻인데 신약성경 구약성경 내용을 다 합쳐서 내용을 단 한 단어로 압축한다면 그 단어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예요. 이 사랑이란 말은 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이란 말은 사회적으로 볼 때 연대할 때 드러납니다. 약한사람 가난한 사람에게 얼만큼 내 손을 내밀어 주는지, 약한 사람과 얼만큼 손을 꽉쥐고 있는지, 사랑은 입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과 맺고 있는 우리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돕고 이런 처지가 개선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사랑이지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것이 사랑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원리가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보조하다, 무엇을 보조하는거예요
우리는 가정 또는 사회 공동체, 지방 정부, 중앙정부, 유엔과 같은 세계공동체를 가지고 있어요. 여러가지 조직이 있잖아요. 크고 작은 조직들이 있는데 이 조직들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인간 존엄성을 위해 있는겁니다

보조성의 원리 또한 인간 위해 있는 것

인간 존엄성을 위해서 정부가 있는거예요. 정부를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위해, 한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가정이든 NGO든 지방정부든 중앙정부든 있는 겁니다. 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 조직과 체계가 존립하는 것입니다. 인간 존엄성을 무시하는 기구가 있다면 설립취지에 걸맞지 않을 뿐더러 존립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원리를 그대로 대입해본다면 용산에서 극렬 폭력 농성을 했던 사람들일지언정 그 사람들은 존엄한 사람들입니다. 존엄한 사람들이며 우리 사회의 약자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사람들을 어떻게 봤어요? 죽어 마땅한 사람인거죠. 특히 국가가 국민이 위임한 공권력을 그렇게 사용했어요. 보조성의 원칙에 전면 위배되는 것이죠.

그 사람들을 도우라고 권력을 줬는데, 그 권력을 그 사람들을 학살하는 데, 살해하는 데 쓴 것입니다. 자,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이번 사태에서 얻을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우리 사회는 지금 먹고살기 힘든 사회입니다. 작년도 4/4분기 경제성장율이 마이너스라고 정부가 공식 발표했죠. 올해 상반기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입니다. 먹고살기 힘듭니다. 안타깝지요. 그런데 먹고살기 힘든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미 옛날부터 힘들었어요. 그렇잖아요?

우리사회가 전도된 사회가 됐어요. 어떻게 전도됐느냐하면 가치의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첫번째 가치는 이익이예요. 이익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꿔도 이제 무관할 정도로 전도된 사회가 돼버렸어요.

얼마 전 어떤 통계를 보니까 10억을 번다면 징역을 살아도 괜찮은가 라는 설문에 답변한 대학생들이 나는 적어도 두자리 수가 아니고 한자리 수에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50%가 넘는 대학생들이 10억을 벌 수 있다면 10년간 감옥을 가도 좋다고 답변을 했다는 데 아주 경악했어요.

전도된 우리 사회의 가치회복을 위해 가톨릭신자들이 반성하고 노력해야

우리 사회가 돈이라면 무엇을 해도 좋다는 사회로 이미 진화됐어요.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를 말하는데, 내가 좀 굶더라도 정의를 구현해야 되겠다, 글쎄요 이거는 몇사람 정도에 머무르고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할수 있겠다는 사회로 갔다면 이건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있는거예요.

그래서 우리 천주교신자들이 반성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반성해야 되느냐? 우리는 이익이 생기고 이익이 어떤 방식으로 생겼는지 묻지만, 모든 이익은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미안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가난한 사람, 물질적으로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 은총에서 배제된 사람이예요. 하느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셈이 되죠. 내가 재물을 많이 벌고 연봉 액수가 높고 내가 운이 좋아서 재물을 증식하고 이익을 많이 내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익을 내지 못하는 사람, 손해보는 사람, 지금 재산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귀착되는 거예요.

우리 가톨릭 사회교리 중에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라는 원리가 있는데 그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얻게 되는 재원 그것이 동산이든 부동이든 이 재화는 무엇을 위해 쓰여야 하는가? 공동선을 향해 쓰여야 하며, 공동선은 존엄성에 귀속되는 것이기에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는데 재화가 쓰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번돈,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니예요.

내가 벌었다 하더라도 인간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내가 재화를 써야 하는 거예요.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재화를 획득할수 있도록 허용하신 이유입니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한 처우를 받는 것에 방치돼 있는데도 나는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집에서 먹고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재화의 보편적 목적에 위배됩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이게 가톨릭 사회교리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정의, 사랑, 평화라는 가치보다도 재화가 더 높은 가치에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 머리속에, 또 우리 신념 속에 하느님은 나에게 재화를 많이 보장해주는 해결사 하느님, 그런 분으로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그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풍년이 들었으니 창고가 모자라 그 창고를 헐어버리고 새창고를 지어, 가지고 있는 재화를 보관해야지 하고 생각하는 인색한 부자가 있었는데 하느님은 그사람에게 얘기합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 네 영혼을 데려갈 것인다. 그러니 자기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하느님한테 인색한 사람은 이와 같이 될거다 라고 말입니다.

무고한 희생자들 위해 기도 당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하느님이 정말 바라는 것은 우리보다 약하고 어려운 사람과 우리가 얼마나 연대하고 살 건가, 얼마나 그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살건가, 그래서 우리가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갈 건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건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이렇게 망루로 몰아넣는 무자비한 재개발, 뉴타운 개발을 포함해서 이런 재개발 사업은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가난한 사람도 삶의 질이 더 높여지고,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이익을 얻는 합리적인 재개발 , 그리고 주택은 재산 증식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보금자리, 그 기능을 재대로 수행할 수 있는 주택정책이 하루빨리 이땅에 정착되기를 바랍니다.

아마 하늘나라에서 지금 이 정국을 내려다볼 용산 철거민 희생자들의 영혼들도 제가 지금 말씀드린 대로 사람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주택정책과 재개발 정책이, 이 땅에 이분들의 희생을 통해 정착되기를 바라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잠시 무고한 희생자들을 다시한번 마음속에 되새기면서 그분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이강서 신부


상인숙/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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