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열의 음악과 나 - 20]

브람스가 작곡한 피아노곡 전집 중에 <헝가리 무곡>이 있습니다. 모두 4권 전 21곡인데, 집시 음악의 이국적인 정서가 넘쳐나는 곡들로, 주요 선율은 헝가리 민족(중앙아시아에서 이동해 온 유목민족)의 무곡 형식이 사용되었는데, 우울하고 비애가 담긴 곡조와 야성적이고 활달한 곡조가 서로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헝가리 무곡>은 “단조에서 제4도 음을 반음 올린다거나, 선율에 각종 장식을 더하거나, 속도를 다양하게 변화시키거나, 느리고 하소연하는 듯한 부분과 빠르고 열광적인 부분을 대비시키거나, 싱커페이션을 두어 리듬에 변화를 가져오는 등의 주법을 사용하고 있는 곡들”(음악지우사 편, <브람스> 389~390쪽)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이나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에 나오는 헝가리풍의 음악이 실은 헝가리의 순수한 전통음악이 아니라, 집시들의 음악이 섞여 들어간 것임이 20세기에 들어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밝혀졌지만, 터키의 지배 하에 있던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소박하고 잔잔했던 헝가리의 전통음악에 당당하면서도 정열적인 집시풍의 음악이 가미된 것이라고 하지요.

<헝가리 무곡>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 유명한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레메니의 피아노 반주자가 된 스무 살의 브람스는 유럽 각지를 다니며 연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레메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브람스에게 헝가리의 집시 음악을 들려주었고, 집시 음악에 깊이 감명을 받은 브람스는 이를 하나씩 메모해두었다가 편곡한 후 악보로 출판했습니다.

당시 일반 가정에서는 두 사람이 한 대의 피아노를 치는 피아노 연탄(連彈)이 유행했던 탓에, 이국적 정서가 가득한 집시 음악을 수록한 피아노 연탄곡집 <헝가리 무곡> 1집과 2집 10곡은 출판사의 예상보다 훨씬 많이 팔려나가게 되었고, 이에 브람스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작곡가와 연주자들은 피아노 독주곡이나, 관현악곡,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편곡해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들 곡 중에 1번과 5번, 6번이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 관현악곡으로도 편곡되어 자주 연주되곤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레메니 등 헝가리 음악가들이 브람스를 저작권 침해로 고소했지만, 오히려 출판사와의 소송에서 패하는 바람에, 이번에는 출판사 측에서 먼저 나서서 브람스에게 3집과 4집 11곡을 출판하도록 종용했습니다.

▲ (왼쪽부터) 요하네스 브람스, 리하르트 바그너

당시 유럽의 음악계는 브람스(1833~1897)와 바그너(1813~1883)가 양분하고 있었는데, 바그너 편에 리스트와 니체가 있었다고 한다면, 브람스 편에는 슈만, 요아힘, 한스 폰 뷜로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대에 활동했으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바그너는 남의 돈을 빌려 쓰고서 갚을 수 없게 되자 멀리 외국까지 도주했던 것은 물론,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의 아내와 염문을 뿌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음악 지지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아내 코지마와 정을 통해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딸을 낳게 하는 등 윤리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브람스는 평생 돈 문제나 여자 문제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었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음악에 있어서도 매우 대조적인 성향을 보였는데, 바그너가 가상의 세계에서 총체성을 추구하며 청중을 허구의 세계로 몰고 가 집단적이고 역동적인 열광을 얻어내었던 것과 달리, 브람스는 자신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 자신의 음악에 있어서 객관화를 고집스럽게 추구했던 음악가였습니다.

한편 음악에 있어서 디오니소스적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철학자 니체는 두 사람의 음악에 대해 매우 상반된 태도를 보였습니다. 반이성주의자였던 니체가 바그너의 가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을 보고서 열렬한 바그너주의자가 되었다가, 악극 <니벨룽의 반지> 전곡 초연을 보고 나서 바그너의 비판자로 돌아섰지만, 브람스의 음악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랄한 비판자였습니다. 브람스의 음악에서는 고대 그리스 예술의 디오니소스적 열정을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과거 전통적인 범주에 그대로 머물고 있고, 철학적 사유도 빈약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베를린 필의 초대 상임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러가 브람스를 독일의 3B(바흐, 베토벤, 브람스) 반열에 올려놓은 이후,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에는 브람스 작풍의 영향을 받은 작곡가가 적지 않았습니다.

브람스는 평소에 바흐부터 슈만에 이르기까지 대가들의 작품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균형과 절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음악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행하던 리스트나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관심과 무관심의 차원을 떠나 그의 기질과 전적으로 맞지 않았습니다. 브람스의 음악을 들어보면, 리스트나 바그너의 음악을 들을 때와는 달리, 서정성이 가득하면서 중후하고 구성이 탄탄한 음악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 사회적 성향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사람들의 기준에 따르면, 당시 유럽의 음악계에서 보수적 성향을 대변하는 이가 브람스일 테고, 진보적 성향을 대변하는 이는 바그너라고 할 수 있을 테지요.
 

 
이광열
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해 줄곧 국내외 현장에서 근무했다. 저서로 <종교와 나>, <건설 현장과 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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