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열의 음악과 나 - 마지막 회]

▲ ‘오페라의 오케스트라’, 에드가 드가(1869)
음악을 들을 때 듣는 사람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음악을 들으면, 어떤 때는 기분이 고조되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가라앉기도 합니다. 음악의 어떤 부분이 그러한 작용을 일으킬까. ‘음악을 들을 때 우리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신경과학자 레비틴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음악 청취는 특정한 순서에 따라 뇌 부위를 차례로 활성화시킨다. 먼저 청각 피질이 소리의 구성성분을 처리한다. 이어 전두엽 부위가 활성화되는데 음악 구조와 기대감 처리에 관여한다. 마지막으로 소뇌가 활성화되는데 리듬과 박자의 처리를 돕는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의 뇌에서 벌어지는 일은 소뇌에서 전두엽까지 다양한 부위들이 가동되는 섬세한 오케스트라 앙상블이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이렇게 딱딱하게 설명하는 글은 흔치 않지만, 그가 던지는 질문과 그에 대한 설명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즉 ‘음악을 들을 때 우리의 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음악적 소리는 어떤 경로를 거쳐서 처리되는가. 협화음을 들을 때와 불협화음을 들을 때 뇌의 반응은 어떻게 다른가. 뇌는 음악을 어떤 방식으로 저장하고 다시 끄집어내는가. 음악이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메커니즘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과 설명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음악적인 존재이며, 음색을 기억하고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의 능력은 대단히 정교하고, 인간의 진화에 음악적 창조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레비틴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음악은 듣는 사람과 별개로, 음악 자체로 존재할 수 있으나, 듣는 사람 속에서 생명력을 갖고 존재합니다. 음악이 무엇이며, 음악을 체험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한스 귄터 바스티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음악은 인간이 자기실현을 이루게 만드는 매체이자 그 중요한 요소이며,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체험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며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특별한 방식이다. ‘세계 내 존재’로서 인간이 살아가며 소리를 내고 듣는 근본이 음악이다. 음악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으로서의 인격 완성, 곧 ‘정의된 나’를 이루게 해주는 기회이다.”

또한 음악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작곡가인 포레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음악이란 우리를 매일의 삶으로부터 될 수 있는 한 멀리까지 올려주려고 존재한다.”

음악과 관련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작곡가가 있고, 연주자나 성악가가 있는가 하면, 청중이 있습니다. 물론 그 역할이 중첩되기도 합니다만, 각자의 입장에서 음악이 갖는 의미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 클래식 음악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음악회에 가는 것도, 값비싼 오디오를 장만하고 희귀한 음반을 구해서 소장하고 듣는 것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의 입장에서 클래식 음악은 가까이 하기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웠고, 또 그러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까닭에, 클래식 음악과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음악과 관련한 특별한 계기나 사전 지식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음악 위주의 프로그램을 하루 종일 방송하는 FM 방송국을 통해 음악가와 곡에 대한 전문가의 자세한 해설을 곁들여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것과 더불어,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늘어나면서, 일반인들도 클래식 음악에 대해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조금씩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IT 기술의 발달로 인터넷을 통해 음원의 공유가 가능해지고, 듣고 싶은 곡만 다운로드 받아 자기만의 음악 앨범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클래식 음악은 일반 대중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스마트폰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곡을 실시간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과거와 달리 손만 뻗으면 손 닿는 곳에 음악이 있는 셈입니다.

음악 장르별로 다양한 해설서가 나와 있고, 음반도 넘쳐납니다. 연주회도 자주 열리고, 각종 음악 동호회도 넘쳐날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어느덧 음악이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된 듯합니다.

작곡가인 마누엘 데 파야는 ‘음악의 이해’와 관련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음악을 이해해야만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도 그의 전기에서 쓰고 있습니다. “음악이 표현하는 것은 그 음악을 들었을 때 청중이 느낀 것 바로 그것이다. 음악을 이해하는데, 반음, 온음, 화음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음악이 우리에게 뭔가를 말하고, 어떤 느낌을 주고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다면 우리는 음악을 이해한 것이다.” (다니엘 호프 · 볼프강 크나우어 지음, 김진아 옮김, <박수는 언제 치나요?> 31쪽)

사람이 음악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음악가들과 그들의 음악세계를 만날 수 있음은 이제껏 살면서 놓치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 중의 하나일 수 있습니다. 음악이 가진 힘이라고 하면, 음악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서로 연결시켜주고, 음악을 듣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음악을 들으며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어떠한지 깨닫게 해준다는 점일 것입니다.

‘음악과 나’. 보는 관점에 따라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음악은 시간 예술이라는 특징과 그로 인한 한계 때문에, 인간의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갈 수 있고, 그럼으로 해서 ‘대상과 나’의 경계를 허물 수 있다”고, 헤겔이 그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통해 주장했던 것처럼, 음악을 들을 때 음악을 통해 음악과 내가 하나로 되는 체험을 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광열
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해 줄곧 국내외 현장에서 근무했다. 저서로 <종교와 나>, <건설 현장과 나> 등이 있다.

이번 회로 ‘이광열의 음악과 나’ 연재를 마칩니다. 성악가들부터 연주자, 음악과 문학의 관계에 관한 것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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