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빈민위, 청빈실천운동 나선다

1997년 4월 28일 청빈선언 대행진 장면(사진제공: 서울대교구 도시빈민위원회)


그리스도 교회는 그 근본으로 ‘가난’을 갖고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땅도 없이 집도 없이 ‘구유에 누우셨던’, 그리고 ‘머리를 기대 곳조차 없이’ 살다가 죽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교는 가난의 종교라기보다는 중산층을 위한 종교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교회 안팎으로 받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목적이고 실천적인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교회는 시대가 요청하는 도전적 질문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또한 그에 대한 해답과 실천을 내어 놓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설립정신으로 삼고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위원장 이강서 신부)를 방문하여 빈민사목과 그 실천방향인 ‘청빈운동’을 통하여 그 해답을 찾아보았다.

빈민사목의 태동과 정신, 사명, 사목원칙

빈민사목위원회는 우리나라의 산업화정책과 도시개발과정 속에서 형성된 도시빈민 지역에 투신해 활동한 ‘천주교도시빈민회’ (1985년 창립, 약칭 ‘천도빈’)가 도시빈민의 존재를 교회 안팎으로 알리는 한편, 이들을 위한 사목기구 설립을 서울대교구에 건의하면서 1987년 4월 28일에 ‘도시빈민사목위원회’(약칭 도빈위)가 설립되었고, 도빈위는 1995년 ‘빈민사목위원회’(약칭 빈민위)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빈민위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설립 정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난한 사람들이 온전히 해방되는 사귐과 섬김, 그리고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기본사명으로 삼고 있는데, 이에 따른 사목원칙으로는 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원칙, ② 삶과 복음을 일치시키는 원칙, ③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원칙, ④ 삶의 자리 불가침의 원칙, ⑤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운동 등을 들고 있다.

빈민위는 설립 이후 교회와 사회 빈민운동 단체들과의 긴밀한 연대활동을 통해 강제철거 반대와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 입법운동에 동참하며 청빈운동을 통해 끊임없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우리 사회에 촉구해왔다.

1992년 빈민지역에 도시공소를 세워 활동한 이래 현재 다섯 개의 ‘선교본당’(무악동, 삼양동, 봉천3동, 금호1가동, 장위1동)과 아홉 곳의 ‘평화의 집’을 세워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있으며, 가난한 이들의 협동조합을 지원하고 연대하기 위해 무담보 신용대출조합인 ‘명례방협동조합’을 설립하였고, ‘한국가톨릭 스카우트 명례방지구연합회’의 이름으로 저소득 아동ㆍ청소년을 위한 스카우트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근로능력이 있는 저소득층에 대한 집중적ㆍ체계적 자활지원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자활센터’ 두 군데를 운영하고 있다.

청빈실천운동을 호소한다

빈민위가 내세운 청빈실천운동을 어떤 의도에서 시작하였는지 물었을 때 위원장 이강서 신부는 빈민위의 활동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사무실에서, 이강서 신부

"지난 1997년, 빈민사목 1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우리시대 빈민사목이 제안할 수 있고 호소할 수 있는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 끝에 찾은 것이 ‘청빈운동선언’이었습니다. 10주년 되는 날, 종로성당에서 ‘청빈운동선언문’을 낭독하고 종묘에서 장충단공원까지 ‘집없는 이들을 위한 청빈선언대행진’을 펼쳤습니다. 정치ㆍ경제ㆍ교육ㆍ집 문제 등 사회적 이슈였는데, 신앙의 논리에서 보면 청빈의 관점에서 해결해야 할 입니다. 가난하게 살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며, 청빈하게 살자는 것이었지요.

그후 10년이 또 지나 회상해보니, 교회에서도 빈민사목 안에서도 선언으로 그치는 것 같았습니다. 20주년이 되는 해에 가난한 사람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되겠다, 가난한 사람의 아픔이 우리의 탐욕으로 가중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10년 전의 청빈운동선언을, 이제는 구체적 노력과 실천으로 가야겠다고 결의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우리끼리만 아니라 제도교회와 신앙인들에게도 호소해야겠다는 것이었죠, 청빈의 가치는 특수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빈민위는 이러한 청빈실천운동의 방향을 3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에 따른 세부지침을 두고 있다. 청빈실천 10년 과제 중, 1단계에서는 우리 안의 역량을 강화하는 단계로 교육과 양성에 우선적으로 집중하고, 2단계에서는 연대, 3단계에서는 교회와 사회의 청빈실천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칫하면 가이드라인으로 그칠 수 있기 때문에 서두를 문제가 아니며, 지금은 자원양성에 촛점을 둔다고 이신부는 덧붙여 설명하였다.

“행복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빈민사목 사순특강

빈민위가 표방하는 청빈실천운동 1단계는 ‘교육’으로, 빈민위는 올해 사순시기 동안 격주로 활동가와 선교본당신자, 일반신자 등을 대상으로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공개강연회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빈민활동에 관여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교육을 펴왔다면, 이제는 현장의 사람뿐 아니라 가난한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강수돌 교수, 문규현 신부, 고병헌 교수와 류정순박사 등이 강사로 나와 “행복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경제와 소비, 생명 평화 환경, 교육과 문화, 여성과 가정의 눈으로 바라본 가난과 청빈의 문제를 함께 나누고 고민할 예정이다.

“청빈은 불편합니다.”

이강서 신부는, 빈민사목의 목표와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청빈하게 살자’라는 것이라 답하는데, 많은 이들이 ‘그것은 수도자의 삶이라고 말하거나 지금도 충분히 가난한데 얼마나 더...’라는 반응을 보인다면서 청빈에 대해 이렇게 간결하게 정리하였다.

“신앙은, 귀중한 보물임과 동시에 도전하는 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주는 것과 질적으로 다른 행복을 주는 것이 신앙이며, 이러한 신앙의 요청에 우리는 부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청빈은 불편합니다. 그러나 내 대신 그 불편함을 견디는 모든 사람을 방치하면 안 됩니다. 그 불편함을 나누어야 합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이나 빈민활동가들이 가지고 있을 ‘돈 벌고 싶다’는 보편적 심리에 대해서는 그는 이렇게 답하였다.

“청빈이란 단어는 양날을 가진 칼인데,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했다는 말하는 우리에게 향하는 날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양식 있는 이들을 향한 날이지요. 궁극적으로는 우리와 우리 교회가 가난을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대하느냐가 척도가 되어야 하는 거죠. 청빈은 사목자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 묻는 것이고 우리 교회는 이것에 답해야 합니다.”

한편 이강서 신부는 올해 교황청에서 발표한 <평화의 날 담화문>을 인용하며 “평화의 가장 큰 적은 ‘빈곤’입니다. 빈곤을 퇴치해야 할 돈을 포탄에 투여하는 상황이지요. 담화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빈곤 안에서도 격차가 있고, 빈곤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라는 겁니다. 이 빈곤과 가난함의 문제는, 풍요를 탐닉한 사람들의 부산물입니다. 물질적 풍요가 없으면 물질적 빈곤이 없습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장위1동 선교본당 수요미사에 참석한 신자들. 이날 미사에는 1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이강서 신부는 누추한 마굿간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에 대하여 강론을 하였다. 


단순소박한 삶, 교회가 그 대안을 되어야

장위1동 선교본당의 주임신부이며 빈민위의 위원장으로서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 신부는, 청빈은 다른 말로 ‘단순소박한 삶’이며, 그러나 청빈의 가치와 상반되게 물질의 풍요만을 부추겨온 종말론적 가치관을 질타하였다.

“한 사회의 최저생계비를 전지구적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중간으로 사는 것은 세계적 차원에서는 상대적으로 중간 이상으로 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 시야를 넓혀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충분히 풍요로운데, 더 풍요로워지려하는 욕심 때문에, 풍요를 향한 질주가 풍요의 앞자리와 뒷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지구에 결핍이 없었는데 누군가가 더 가짐으로써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또한 잉여의 분배란 빼앗은 것을 되돌려주는 의미이며, 이 정도면 우리는 충분히 풍요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가치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가 그 대안의 모형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이천 년 동안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왔지만 늘 다음으로 미루어 왔습니다. 교회는 스스로 쇄신한 적이 없고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쇄신되었지요. 이런 걸 생각하면 교회가 빨리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야 정말 가난한 참 교회가 되겠지요.”

교회가 빨리 망했으면 좋겠다는 그의 역설적 표현에서 그의 가난과 그리고 교회에 대한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세상과 다름없는 기존 교회의 성장에 대한 욕구를 바라보며 절망하는 이 신부는, 그래도 복음을 간직한 이 교회 안에서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할 힘을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있음 또한 느끼게 하였다.   

배은주 짓다/ 지금여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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